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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영창대군 묘역을 찾다

홍만식(뜸부기) 2021. 10. 11. 21:32

선조님의 발자선조님의 발자취를 찾아 연휴인 오늘은 (10월11일) 경기도지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먼저 평택향교를 탐방하였으나 우리선조님과 깊은 관련이 없음을 느껴 평택 진위향교로 직행 하였다.

 비각을 세워 비문을 잘 보존하고 있었다. 비각창살 두개를 들쳐 올리고 들어가 하나도 빠짐없이 촬영했지만 우리 선조님과는 거리가 멀었다.

 조선후기 예조판서,한성부판윤,판의금부사를 지내신 효헌공(孝憲公) 홍명호(洪明浩) 묘역을 탐방하는 길목에 있는 영창대군 묘역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영창대군은 선조의 적자이자 광해군의 이복동생이며 어머니는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이다. 

더구나 친누이인 정명공주께서 우리 풍산홍씨가로 출가를 하였으니, 남이라고 생각 되지 않는다.

 

 광해군 재위 시에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한다는 무고에 연루되면서 유배지에서 살해되었다.

 선조가 임진왜란 중에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은 적자도 장자도 아니었고, 명나라의 책봉도 받지 못했다는 명분상의 약점이 있었다.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유영경 등의 외척과 소북세력이 영창대군을 세자로 다시 책봉하려 했으나, 선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무산되었다. 선조는 임종 전에 유영경, 한흥인 등의 7대신에게 영창대군을 돌봐줄 것을 부탁했다.

 1613년(광해군 5)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박응서가 7대신들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고 무고했다. 

이 일로 7대신 등이 처벌되었으며, 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강화부사에 의해 살해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관작이 복구되었다. 

 

나의 선친께서 작은 부인을 보셔서 적자인 나보다 네살위의 이복형과 동갑인 동생을 두고 살았다.

동네 선배들이 이간질을 시켜서 동생과 싸움을 부쳤다.

“아버지가 진짜로 누구 아버지냐? 걔가 그러는데 네 아버지가 아니라던데?”

결국 돌팔매질 하면서 동생과 싸웠다.

지금은 이복 형제들과 좋은사이로 지내고 있지만 주변 사람들이 불화를 일으켜 싸움질을 시키는걸 어렸을때 알았다.

 

종중재산권 소송 문제로 본의 아니게 입장이 어려워진 종친들을우리는 모두 이해를 해주어야 한다.

종손을 보호하고 서로 위하는 모습으로 종중을 이끌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