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갤러리/풍산홍씨관련유물,유적 36

18世祖 홍국영 간찰

홍국영(洪國榮 1748~1781) 정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최초의 세도정권을 이룬 인물로 평가되었다.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주동자 역활을 한 벽파들이 세손(훗날 정조)까지 해하려고 음모를 꾀하는것을 막아 정조의 목숨을 지켜 왕위까지 오르게 하였지만 토사구팽을 당하여 강릉에서 쓸쓸히 죽음을 마지한 풍운아이다. 역사는 오로지 힘있는자의 잣대로 평가되기 마련이다. 우여곡절 끝에 내손에 들어온 간찰의 진위를 벗어나 천하의 명필로 보인다. 무슨 내용인지 번역을 의뢰하여 세상에 알리고자 한다.

쓰레기더미에서 보물을 캐다

만퇴당(홍만조) 묘역 성역화사업 중 자은영당 옆 추원각이 지붕의 기와가 내려앉아 비가 새고 고장 난 문을 오랫동안 방치해 논 상태라 흉물에 가깝다. 먼지 쌓인 쇼파등 잡동사니를 치우다 보니 장지문이 보였다. 옛날 종택의 안방 중간에 있었던 장지문이 아닐까? 자세히 보니 장지문에 덧댄 창호지에서 글씨가 보여서 물에 불려 고문서를 3장을 살려냈다. 첫 번째 문서와 둘째 문서는 영동 현감인 좌랑공( 重衡) 묘소와 관련된 문서로 보인다. 좌랑공을 양성(안성)에 모셨다는 내용 같은데 상세한 내용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세 번째 문서는 토지매매와 관련된 문서로 보인다. 갑진(甲辰)년에 작성되었는데 종손인 건모(建謨) 선조는 1765년에 태어나 90세인 1854년에 돌아가셨으니 1844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

지지대비(遲遲臺碑)

수원시 장안구에 있는 지지대비를 찾았다. 지지대비(遲遲臺碑)는 조선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기 위해 순조 7년(1807) 화성 어사 신현의 건의로 세워진 비이다. 정조는 생부인 사도세자 능인 화성의 현륭원에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만 넘어서면 멀리서나마 능을 볼 수 없게 되므로, 으레 이곳에서 행차를 멈추었다고 한다. 능을 뒤돌아보며 이곳을 떠나기를 아쉬워하였기 때문에 이곳에 이르면 왕의 행차가 느릿느릿하였다고 하여 한자의 느릴지(遲)자 두 자를 붙여 지지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비의 비문은 홍문관제학 서영보가 짓고,윤사국이 글씨를 썼으며, 화성유수 홍명호(洪明浩)가 전액을 썼다. 비운의 생애를 마친 아버지에 대한 정조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올해 94세인 고모님의 생..

암행어사 홍철주영세불망비

충청남도의 비석군은 빠짐없이 답사를 하였다고 자부 했는데, 아직도 멀은것 같다. 예산군 오가면 역탑1리 마을회관 앞에 비석군이 있는데 맨 오른쪽에 어사홍철주영세불망비가 있다. 왼쪽으로 어사 이중하 영세불망비가 1893년3월에 세워졌으며 본관은 전주(全州),다음은 관찰사 조병식불망비 본관은 양주(陽州), 군수김병원(金炳鵷)애민선정비,국사보계장 권영섭기념비, 전면장 오정선씨 치적기념비,김공기태애휼기념비, 국사당보계리사 오시영기념비등이 있는데 대부분 농업용수관련한 공로비로 보인다. 안내문에는 아래와 같다. ○ 건립시기 :1867년4월 ○ 홍철주(1834~?) 조선말기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백영(伯泳) 1859년(철종 10) 진사로서 증광별시 병과에 급제하였다. 1866년(고종 3) 조정에서 탐학행..

선조님의 발자취 보령,홍성

2021년 8월 22일 일요일 내친김에 보령성곽이 있는 보령중학교로 달렸다. 야생화탐사 시절 무심코 흘려버렸던 비석군이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이산해가 썼다는 해산루(海山樓) 보령성곽 앞에 비석군이 있지만 우리 선조님관련 비석은 없다. 쭈꾸미낚시 다닐때 보아 두었던 충청 수영성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성곽에 오르니 군사기지로 천혜의 요건을 갖추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눈에 바다를 내려볼 수 있는 위치이다. 내가 여기 온 목적은 단 한가지 선조님의 발자취를 찾는일 이다. 드론을 띄우기위해 밧데리를 새로 구입 하였건만 오늘은 사용할 여유가 없었다. 성터안에 오직 보령 유격장군 청덕비만 있었다. 실망을 하면서 차를 돌리려는 순간 도로 건너에 유서 깊은 건물이 보인다. 충청수영 장교청(객실) 아래에 비석군이 배치되..

15世祖 대사헌 홍경보(洪景輔) 묘지(墓誌)

대사헌 홍경보(洪景輔) 묘지함 뚜껑 대사헌(검찰총장) 홍경보 묘지(墓誌) 고조부는 南原府使 시며 영국공신(寧國功臣)에 훈록된 ?(탁), 증조부 예산현감을 지내신 柱文, 조부는 承政院都承旨(승정원도승지) 萬鍾(만종) 이며, 전라도관찰사를 지내신 重夏(중하)가 부친이다 이 유물은 대사헌, 도승지, 대사간 등 요직을 두루 거친 홍경보(1692-1745)의 묘지(墓誌)이다. 묘지를 쓴 연대는 1772년이며, 지석의 형태는 오석에 음각을 하고 글자 안에 주칠을 하였다. 내용을 살펴보면 대체로 본관과 이름, 조상의 계보, 생일과 죽은 날, 평생의 행적, 가족관계, 무덤의 소재와 방향 등이 기록되어 있다. 자획이 뚜렷하고 내용 또한 매우 풍부하여 좋은 연구자료이다.

예조판서 홍명한(洪名漢)초상화

조선 후기의 문신 홍명한(洪名漢, 1724년∼1774년)은 풍산홍씨 16세조 이시다. 선조님 시제 봉행을 지극정성을 다하다 보니 종손들을 만나게 되어 선조님의 귀한 자료를 확보 하게 되었다. 초상화를 그리기 위한 초본 보존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자료를 보내어 초상화를 온국민과 공유하도록 하겠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군평(君平). 시림와(市林窩), 남원공파. 고조부는 증호조참판 예산현감 홍주문(洪柱文), 증조부는 승정원도승지 홍만종(洪萬鍾), 조부는 증이조판서 전라도관찰사 홍중하(洪重夏), 부는 증의정부좌찬성 대사헌 홍경보(洪景輔)이며, 모는 승지 심계량(沈季良)의 딸이다. 문음(門蔭)으로 입사(入仕)하여 금부도사로 재직 중 1754년(영조 3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

풍산홍씨 남원공파 종가의 함(函)

남원공파 종가의 함(函) 풍산홍씨11세조 탁 ?(1597~1651 ) 남원부사(南原府使, 寧國功臣) 께서 목민관으로 계시면서 민정 시찰 중이셨다. 한 여인이 길에서 해산하는 딱한 광경을 보셨다. 公께서 그 여인을 관아로 데려가 정성껏 보살펴 주신 뒤 돌려보내셨다. 그런데 이 모습을 한 스님이 보셨다고 한다. 그 후 公께서 관아(官衙)에서 집무 중 잠깐 주무셨는데, 꿈에 그 스님이 나타나 함을 사라고 해서 그 함을 열어보니 그 안에 홍패(大科)와 백패(小科)가 가득 들어 있었다. 깜짝 놀라 잠을 깨니, 꿈에 본 그 스님이 실제로 함을 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공은 즉석에서 은 세 되를 주고 그 함을 샀다. 그 후 실제로 남원공 계의 선조들께서 함에 가득할 정도로 여러 분이 소과와 대과에 합격하시었다. 이..

풍산홍씨 家 유물전

은제삼작노리개,조선시대 매죽문 장식의 방아다리, 중앙에 복자(福字)를 새긴 원형 투호(投壷)와 가운데 수자(壽字)를 새긴 육모형 투호로 구성되어 있다. 섬세한 은세공(銀細工) 솜씨가 돋보이는 중삼작(中三作) 노리개이다. 노리개의 매화문 중앙에 계관석(鷄冠石)을 물려 화려함을 더하고 있으며 위쪽에는 칠보 나비형 띠돈, 아래쪽에는 남 · 홍 · 황3색의 쌍봉술로 장식하였다. 영·정조시대의 풍산홍씨家 유물을 숙명여대에 기증한 것이다. 11월 30일에 국보로 지정되는 우리문중의 기사계첩(보물 639호)을 박물관에 기탁하고 싶다. 보물은 여러사람이 함께 볼 수 있어야 진정한 보물이 될 수가 있는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