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갤러리 829

사람은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할까?

10년 전 6만 원 주고산 구두 지금까지 구두 닦는 비용은 대략 60만 원 정도 목욕 갈 때마다 구두 닦는이에게 오천원씩 지불했다. 물론 구두닦는 비용은 오천에 못 미쳤다. 소아마비를 앓는 구두 닦는 젊은이가 굶지 않도록 배려해 왔다. 톨스토이가 쓴 「사람은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할까?」 를 읽었다 땅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바흠’이라는 농부가 있었다. 바시키르족의 촌장이 땅을 판다는 소식을 듣고 ‘바흠’이 달려갔다. 촌장은 하루에 걷는 만큼의 땅을 1,000 루블에 판다고 헸다. 한 가지 조건은 해가 지기 전까지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바흠’은 하루종일 한 걸음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죽어라고 걸었다. 그는 얼마나 많은 땅을 차지하였을까? 마지마 책갈피를 열어보자. 바시키르 사람들은 혀를 차며 그를 불쌍..

사갈하르와

코로나19 사태로 4년 연속 이어지던 몽골 여행을 코로나가 주춤한 틈을타 3년 만에 다시 찾은 몽골! 흡수골에 머무는기간은 나담축제와 만나게 되었다. 흡수골 지역에서는 순록 축제라는 명제 하에 나담축제의 전초전이 열리는 것이다. 몽골 씨름장이 단연 사람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끄는 장소이다. 씨름장을 지나니 우리나라 윷놀이를 연상시키는 놀이가 보인다. 윷가락을 던질 때마다 윷이나 모가 나오면 한 사발의 막걸리를 대접하고 한바탕 춤사위를 벌리던 그런 분위기이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노래는 세계 공통어인 것 같다. 몽골다운 놀이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참으로 반갑다.

18世祖 홍국영 간찰

홍국영(洪國榮 1748~1781) 정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최초의 세도정권을 이룬 인물로 평가되었다.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주동자 역활을 한 벽파들이 세손(훗날 정조)까지 해하려고 음모를 꾀하는것을 막아 정조의 목숨을 지켜 왕위까지 오르게 하였지만 토사구팽을 당하여 강릉에서 쓸쓸히 죽음을 마지한 풍운아이다. 역사는 오로지 힘있는자의 잣대로 평가되기 마련이다. 우여곡절 끝에 내손에 들어온 간찰의 진위를 벗어나 천하의 명필로 보인다. 무슨 내용인지 번역을 의뢰하여 세상에 알리고자 한다.

쓰레기더미에서 보물을 캐다

만퇴당(홍만조) 묘역 성역화사업 중 자은영당 옆 추원각이 지붕의 기와가 내려앉아 비가 새고 고장 난 문을 오랫동안 방치해 논 상태라 흉물에 가깝다. 먼지 쌓인 쇼파등 잡동사니를 치우다 보니 장지문이 보였다. 옛날 종택의 안방 중간에 있었던 장지문이 아닐까? 자세히 보니 장지문에 덧댄 창호지에서 글씨가 보여서 물에 불려 고문서를 3장을 살려냈다. 첫 번째 문서와 둘째 문서는 영동 현감인 좌랑공( 重衡) 묘소와 관련된 문서로 보인다. 좌랑공을 양성(안성)에 모셨다는 내용 같은데 상세한 내용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세 번째 문서는 토지매매와 관련된 문서로 보인다. 갑진(甲辰)년에 작성되었는데 종손인 건모(建謨) 선조는 1765년에 태어나 90세인 1854년에 돌아가셨으니 1844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

지지대비(遲遲臺碑)

수원시 장안구에 있는 지지대비를 찾았다. 지지대비(遲遲臺碑)는 조선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기 위해 순조 7년(1807) 화성 어사 신현의 건의로 세워진 비이다. 정조는 생부인 사도세자 능인 화성의 현륭원에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만 넘어서면 멀리서나마 능을 볼 수 없게 되므로, 으레 이곳에서 행차를 멈추었다고 한다. 능을 뒤돌아보며 이곳을 떠나기를 아쉬워하였기 때문에 이곳에 이르면 왕의 행차가 느릿느릿하였다고 하여 한자의 느릴지(遲)자 두 자를 붙여 지지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비의 비문은 홍문관제학 서영보가 짓고,윤사국이 글씨를 썼으며, 화성유수 홍명호(洪明浩)가 전액을 썼다. 비운의 생애를 마친 아버지에 대한 정조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올해 94세인 고모님의 생..

암행어사 홍철주영세불망비

충청남도의 비석군은 빠짐없이 답사를 하였다고 자부 했는데, 아직도 멀은것 같다. 예산군 오가면 역탑1리 마을회관 앞에 비석군이 있는데 맨 오른쪽에 어사홍철주영세불망비가 있다. 왼쪽으로 어사 이중하 영세불망비가 1893년3월에 세워졌으며 본관은 전주(全州),다음은 관찰사 조병식불망비 본관은 양주(陽州), 군수김병원(金炳鵷)애민선정비,국사보계장 권영섭기념비, 전면장 오정선씨 치적기념비,김공기태애휼기념비, 국사당보계리사 오시영기념비등이 있는데 대부분 농업용수관련한 공로비로 보인다. 안내문에는 아래와 같다. ○ 건립시기 :1867년4월 ○ 홍철주(1834~?) 조선말기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백영(伯泳) 1859년(철종 10) 진사로서 증광별시 병과에 급제하였다. 1866년(고종 3) 조정에서 탐학행..

선조님의 발자취 보령,홍성

2021년 8월 22일 일요일 내친김에 보령성곽이 있는 보령중학교로 달렸다. 야생화탐사 시절 무심코 흘려버렸던 비석군이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이산해가 썼다는 해산루(海山樓) 보령성곽 앞에 비석군이 있지만 우리 선조님관련 비석은 없다. 쭈꾸미낚시 다닐때 보아 두었던 충청 수영성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성곽에 오르니 군사기지로 천혜의 요건을 갖추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눈에 바다를 내려볼 수 있는 위치이다. 내가 여기 온 목적은 단 한가지 선조님의 발자취를 찾는일 이다. 드론을 띄우기위해 밧데리를 새로 구입 하였건만 오늘은 사용할 여유가 없었다. 성터안에 오직 보령 유격장군 청덕비만 있었다. 실망을 하면서 차를 돌리려는 순간 도로 건너에 유서 깊은 건물이 보인다. 충청수영 장교청(객실) 아래에 비석군이 배치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