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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무원종공신녹권-장서각

홍만식(뜸부기) 2019. 8. 29. 20:41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1728년(영조 4)에 奮武原從功臣 2등에 책봉된 都事 홍중인에게 발급된 공신녹권이다.

장서각에 정식 공문을 발송하여 공신녹권을 사진파일로 받았다.

분무원종공신 1등 장령 홍중징,2등 도사 홍중인은 형제인데 만퇴당(휘 만조)의 세째아들이 重寅이요 네째가 重徵이다.

왕의 傳旨를 받은 동부 승지 洪景補는 두분의 조카가 된다.

 성호이익 선생께서 지으신 분무원종공신 공조판서 홍중징묘지명을 보면 당시 활약을 알 수 있다


겨울에 정익공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무신년(1728, 영조4) 봄에 상기를 마치자 또 장령에 제수되었다. 당시 고향 집에 있었는데, 나라에
역란(逆亂)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졸지에 듣고는 달려가 임금에게 문후하기 위해 즉시 길을 떠났다. 길을 우회해 가며 난관을 뚫고 도성에 득달해서는 곧장 입궐하여 숙배한 뒤에 도로에서 들은 바를 진달하였는데, 창졸간에 질문에 따라 적절히 응답하였는데도 핵심을 짚어 낸 것이 많았으므로 상이 자못 가납하였다. 당시에 국옥(鞫獄)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는데 적괴가 몰래 달아나 숨자 공은 여러 대신(臺臣)들과 소장을 올려 역적이 체포되기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파가저택(破家瀦澤)과 노적(孥籍)의 형전(刑典)을 시행하기를 청하였다. 여름 4월에 상이 애통해하는 교서(敎書)를 내렸는데, 간곡하고 안타까워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공이 역란이 일어나게 된 근본 원인을 파헤쳐 아뢰기를,

“양역(良役)을 변통(變通)하는 문제는 전후의 연대(筵對)에서 발언한 것이 매우 많았지만 끝내 하나로 귀결되지 못하여 그대로 답습하면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방치해 두고 있습니다.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도는 백성들이 서로 이끌어 도적의 소굴로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백성을 편안히 하는 계책은 수령을 잘 고르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으니, 수령이 적임자가 아니면 전하께서 아무리 날마다 덕음(德音)을 내리더라도 결국에는 여리(閭里)에까지 파급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당시 궁가(宮家)의 절수(折受)와 여러 도(道)의 물선(物膳) 및 승여(乘輿)나 복식(服飾) 등의 도구와 백사(百司)의 시급하지 않은 비용을 혁파하라는 명이 내렸다. 공이 또 이로 인하여 근원적인 처방에 대해 논하면서 권면하여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천하의 일은 임금의 일심(一心)에 근본하니, 천리(天理)와 인욕(人慾)이 호리(毫釐)에서 나뉘지만 국가의 존망이 여기에 매여 있다고 합니다. 근일의 일을 놓고 보건대, 이는 바로 천리가 발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참으로 이 같은 마음을 항상 지니고 이를 확충하여, 난역이 이미 평정되어 생민(生民)들이 다소 안정되었다고 하지 마시고 의리로써 재단하실 수 있다면, 옛말에 이른 바 ‘깊은 근심이 성군을 만들고, 많은 어려움이 나라를 일으킨다.’라는 것이니,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입니다.”

하였는데, 뒤에 비지(批旨) 가운데에 이 대목을 거론하면서 특별히 칭찬한 것이 세 차례나 되었다. 7월에 종부시 정으로 있다가 순천 부사(順天府使)에 제수되었다.

  자랑스런 14세 조부님의 역사적자료를 영인본으로 간행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