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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世 홍이상의 묘

홍만식(뜸부기) 2016. 5. 8. 19:44










◎ 10세 : 홍이상(洪履祥, 慕堂) 1549(명종 4) ~ 1615(광해군 7)

ㅇ 묘소 위치 : 고양 벽제면 석성동 정강제2혈좌신좌(正崗第二穴辛坐)
※ 신도비(신도비)는 좌의정 월사 이정구(左議政 月沙 李廷龜)께서 묘지(墓誌)는 부제학 창석 이준(副提學 蒼石 李埈)께서 묘표문(墓表文)은 손 영안위 주원(孫 永安尉 柱元)께서 명명(名名) 지음

ㅇ 조선의 문신, 초명은 인상(麟祥), 자는 원례(元禮)·군서(君瑞), 호는 모당(慕堂), 민순(閔純)의 문인으로 1573년(선조 6)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7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예조와 호조의 좌랑(左郞)과 정언(正言)·수찬(修撰)·지제교(知製敎)·병조 정랑(兵曹定郞)을 역임한 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후에 교리(校理)·직제학(直提學)·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거쳐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 참의(禮曹參議)로서 왕을 평양에 호종(扈從), 병조참의(병조참의)에 전임했다.

1594년(선조 7)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그 해 경상도 관찰사로 나가 비변사(備邊司)와 서로 연락, 일본 장군 고니시와 가또오간의 이간책(離間策)을 강구 추진했다.

그 후 대사성(大司成)에 전임, 영남의 유생 문경호 등의 성혼(成渾) 배척 상소를 극구 반박하고 성혼을 변호하다가 안동 부사로 좌천되었다.

1607년 청주목사가 되었다가 1609년(광해군 1) 대사헌을 거쳐 1612년에 개성부 유수가 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

ㅇ 주요 저서
1. 계유사마화산방회록 : 1573년(선조 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사람들 중에서 임진왜란을 겪고도 살아남은 15명이 경북 안동에서 회집(會集)한 기록. 필사본. 1책. 계유사마(癸酉司馬)에 합격한 사람으로, 그 당시 안동부사로 있던 홍이상(洪履祥)이 주최하였다. 모인 사람들의 이름을 열기(列記)하였고, 앞에는 방회도(榜會圖) 1장이 붙어 있다.

회록(會錄)의 서문은 경상도 관찰사(觀察使) 이시발(李時發)이 자필로 썼는데, 그는 계유사마의 한 사람인 이대건(李大建)의 아들로, 이 모임이 있었을 때에는 이미 자기 부친이 작고하였다는 사연이 적혀 있다.

2. 모당집 : 필사본. 3권 2책.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 6대손 양호(良浩)에 의해 편집, 간행되었다. 홍이상의 유묵(遺墨)이 있다. 홍이상은 고양군 고봉현(高峰縣) 출신으로,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이식(李植)과 민순(閔純)에게서 수학하였다. 권1은 시·부, 권2는 소차·계사·발·제문 등, 권3은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상존호소(請上尊號疏)>는 임진왜란 때 서울을 수복한 뒤 선조의 휘호를 더하고자 올린 글이다. <홍문관차자(弘文館箚子)>는 1609년(광해군 원년) 붕당의 폐를 논한 글이다. <구언응지소(求言應旨疏)>는 같은 해 대사헌에 제수되고서 올린 글이다. 그는 광해군이 즉위한 이래 정국이 안정되지 못하여 대신이 출사할 수 없게 된 정치적 현실을 지적하고, 출사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권말에 하강서원 중건추진위원회에서 쓴 추도문이 있다.

ㅇ 유적지
1. 홍이상 선생의 묘와 신도비
고양시 향토유적 제13호로 성석동의 고봉산 남동쪽 기슭(묘소 동남쪽 200m 도로변)에 위치해 있다. 1631년에 세워졌고 총높이 230cm의 신도비는 대리석 재질로, 비문은 좌의정 월사 이정구가 짓고 이현이 썼으며 김상용이 전(篆)을 하였다. 홍이상 선생의 호는 모당, 본관은 풍산, 시호는 문경이다, 조선 명종 4년(1549)에 태어나 경상도 관찰사, 대사헌 등을 지냈으며, 고양 팔현(八賢) 중의 한 분이다.

2. 하강서원 및 모현정
문화재명 지정번호 소재지 시대 주요내용
하강서원 비지정 하담리 이조정조 洪履祥선생의 덕을 기 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하소 10년(1786년) 가 고종1년 전국서원의 철폐령에 따라 문을 닫음, 홍이상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음
모현정 비지정 하담리 이조순조 홍이상 선생의 후손들이 조상을 추모하는
하소 17년(1817년) 뜻에서 건립

※ 충주 국도 19호선(원주,제천)의 갈림길인 금가주유소를 지나 금가파출소와 금가면사무소 방면으로 들어가 호수위에 위치 [연락처 홍기철(풍산홍씨대종회충주지부 풍산홍씨모당공파충주종중 회장) : 청주시 연수동505-15 (043-847-4494, 011-9714-3469)]

※ 일산 유적지에 대하여
◈ 위치 : 일산 2동(종전 일산 6. 7리), 덕방재 고개를 넘어 고봉산 아래 마을에서 하사관 주택 전까지를 포함하며 목축업을 하는 집이 많이 있다. 마을의 촌락들은 대부분 310번 지방도로 부근과 벽제로 이어지는 58번 군도로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 만경사 : 만경사는 벽제읍 성석리로 이어지는 58번 도로에서 고봉산 정상방향에 있는 절의 이름이다. 본래 만경사는 풍산 홍씨 가문의 "모당" 홍이상 선생의 재실을 짓기 위해 이름 붙인 것이라 한다. 모당은 고양 팔현의 한분으로 만경사의 역사는 약 400년 정도 된다고 한다.〔성석리편 참조〕

※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조선 선조(재위: 1567∼1608) 때 문신(文臣)이었던 홍이상(洪履祥)이 창건하였다. 홍이상은 이 사찰을 조상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원당(願堂)으로 삼았고, 영조(재위: 1724∼1776) 때 홍이상의 8세손 홍명주(洪命周)가 중건한 뒤부터 홍이상 후손들이 거주하며 풍산(豊山) 홍씨 문중 재실(齋室)로 삼았다. 1950년 6·25전쟁으로 불에 탄 것을 1955년 경해(景海)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유물로는 대웅전과 요사채 2동이 있다.

◈ 고봉산 : 고봉산은 일산읍·벽제읍·원당읍의 경계에 위치한 해발 208.3m의 산 이름으로 임진왜란 당시 행주산성과 같이 격전지로서 산성에 보루인 돌덩이를 쌓아 돌을 쌓는 단위인 테미의 이름을 따 테미산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이 산은 조선조 때 고양 8현의 한 분인 풍산 홍씨〔호 : 모당〕의 재실을 테미산에 신축코져 종전의 테미산을 산세가 높다 하여 고봉산으로 칭하게 되었으며 이 곳에는 통신 수단의 하나인 봉화대가 설치되었으며 아직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고양군은 고봉산의 "고"자와 덕양산의 "양"자를 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