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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방(陽智方)-16世祖홍욱호

홍만식(뜸부기) 2018. 8. 20. 14:37

조선 후기의 유의 문신 홍욱호(洪旭浩, 1740年~1817年)의 홍역 치료 관련 저술. 1책. 필사본. 개인 소장.

本貫은 豊山이고, 字는 晩鱗이고, 호는 艮九翁이다.

증조부는 좌참찬을 역임하고 판돈녕부사를 지낸 만퇴당 정익공 만조이고, 조부는 공조판서를 지낸 양효공 중징이고, 부는 노성현감을 지낸 순보이다.

조선 후기의 유의 또는 충청도 아산의 지방의로 어의가 아니면서도 임금을 시탕한 특진출장의원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1786년(정조 10) 약방도제조(調)인 홍낙성의 추천으로 입진(), 의약()하였고, 그 공을 인정받아 陽智縣監이 되었다.

1800년 왕의 병이 위급할 때에도 의약하였고, 朔寧郡守를 지냈다.

1815년(순조 15) 의약의 공으로, 관직은 嘉義大夫 戶曹參判 兼 五衛都摠府 副摠管 同 知中樞府事  行 戶曹參議 徑  陽智縣監   朔寧郡守를 지냈다.

《陽智方》이란 책제는 저자가 임술년(1802년) 이책을 저술할 당시의 陽智縣監을 역임한 전력을 들어 정하였고, 저자도 洪陽智로 기술했다.

후에 호조참판을 제수받았기 때문에 《洪參判經驗方》이라는 책제로도 필사본이 있다.

《陽智方》은 <壬戌新方>으로 부기되어 있고 7장 분량의 필사본으로 총론 뒤에 23개의 처방과 구성을 기록하였는데 박속을 이용한 경험방은 홍욱호만의 독창적인 처방이다.


순조실록 순조11년 9월 5일 기사


봉모당(奉謨堂)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중일각(中日閣)에 나아가 시임·원임 대신과 각신(閣臣)을 소견하였으며, 이어서 약원(藥院)에서 입진하였다.


영부사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제절(諸節)이 며칠 전과는 더욱 어떠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특별히 더하거나 줄어든 것이 없다." 하자, 우의정 김사목(金思穆)이 아뢰기를, "홍욱호(洪旭浩)는 본래 선비 출신의 의원이니, 다른 의관(醫官)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연석(筵席)에 익숙하지 못하니 주선(周旋)하여 진찰할 즈음에 만약 천천히 하도록 한다면 성심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니, 그로 하여금 조용히 진후(診候)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시수가 아뢰기를, "의원이 진찰하는 법은 진맥 뿐만이 아니고 모습과 얼굴빛을 관찰하는 것이 더욱 긴요한 것이니, 특별히 홍욱호에게 명하여 천안(天顔)을 우러러보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러러보게 하라." 하였다.

홍욱호가 진맥을 마치고 아뢰기를, "좌관촌(左關寸)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러러보니 어떠한가?" 하자, 홍욱호가 아뢰기를, "소신(小臣)이 한번 우러러보았을 뿐인데, 어찌 감히 우견(愚見)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차례로 말하도록 하라." 하자, 홍욱호가 아뢰기를, "피부[肌膚]는 평시와 같지만 옥색(玉色)은 약간 누른 빛이 있는 듯한데, 모르기는 하겠습니다만, 천안(天顔)이 본래 그렇습니까?" 하니,

김사목이 아뢰기를, "증후(症候)에 대한 제절(諸節)을 상세히 하교한 연후라야 탕제를 의정(議定)할 수 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증후는 비록 두통·복통 등 병자와 같은 모양의 여러 가지 증상은 없지만, 대체(大體)를 가지고 말한다면 금년이 작년만 못하고 작년이 재작년만 못하다. 운동 거지(運動擧止)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가운데 저절로 이와 같다." 하자,

김사목이 아뢰기를, "조동(跳動)하는 증후는 요사이 어떠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가끔 있다."하자, 홍욱호가 아뢰기를,

"가슴 위에 담(痰)이 있는 것 같으니 조동하는 증상은 그럴 것입니다. 탕제는 물러나서 여러 의관들과 상세하고 확실히 강론한 연후에 의정(議定)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