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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통훈대부 행 이성 현감 홍순보(洪純輔) 묘지명(通訓大夫行尼城縣監洪公墓誌銘) -순암 안정복

홍만식(뜸부기) 2018. 1. 16. 07:30

통훈대부 행 이성 현감 홍공 묘지명(通訓大夫行尼城縣監洪公墓誌銘)

 


내가 소시에 벗들로부터 홍공 성언(洪公誠彦)이 있음을 듣고 함께 사귀기를 원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병폐(病廢)한 까닭에 사귀지를 못하였다. 이제 공의 아들 상사(上舍) 극호(克浩)가 상복을 입고 가장(家狀)을 적어가지고 나에게 와서 부탁하기를, “나의 증조ㆍ조부 양대의 묘갈명을 성호 선생에게 받았으니 선고의 묘지명은 반드시 선생의 문도에게 받고자 하는데 공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원컨대, 이로써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감히 할 수 없다고 사양했으나 끝내 고사할 수 없었던 것은 곧 상사의 뜻이 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순보(純輔)이고 성언(誠彦)은 그 자이다. 선계는 안동부(安東府)의 풍산현(豊山縣)에서 나왔다. 그 선대에 간(侃)은 호가 홍애(洪厓)인데 고려에 벼슬하여 도첨의 사인이 되었고 문장과 직간으로 드러났다. 8대를 내려와 휘 이상(履祥)은 호가 모당(慕堂)인데 경술과 문장으로 우리 선조대왕을 보좌하여 관직이 대사헌이었으니, 공에게 5대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주천(柱天)인데 관직은 양성 현감 증 좌찬성이다. 조부의 휘는 만조(萬朝)인데 관직은 판돈녕부사 증 영의정이고 시호는 정익(貞翼)이다. 부친의 휘는 중징(重徵)인데 관직이 행 공조 판서이고 벼슬을 마친 뒤에는 봉조하가 되고 시호는 양효(良孝)이다. 모친은 증 정경부인 동래정씨(東萊鄭氏)로 조(琱)의 따님이니 곧 우의정 나암(懶菴) 언신(彦信)의 후예이다.
공은 숙종 병술년(1706) 11월에 태어났는데, 어려서 자질이 뛰어나 남다른 점이 있었으니 조부 정익공이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장주(掌珠)’라고 불렀다. 나이가 겨우 열다섯 살[舞象]이 되었을 때 문사(文詞)가 날로 진보하였고 자라서는 더욱 스스로 힘써서 과문(科文)을 공부했는데 같이 배우는 무리들이 추중하였다. 계축년(1733, 영조 9)에는 성균관에 오르니 명성이 크게 퍼졌다.
계해년(1743, 영조 19)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슬픔으로 몸을 훼상함이 예제에서 지나쳤고 장사를 지낸 후 묘소 아래 여막에 지내면서 조석으로 묘소 앞에 나아가 곡하기를 비바람이 있더라도 조금도 폐하지 않았다. 병인년(1746, 영조 22) 이후로 발해(發解)가 네 차례, 입선(入選)이 세 차례 있었으나 모두 합격하지 못했으니, 사람들이 모두 공을 애석하게 여겼다. 신사년(1761, 영조 37)에 부친상을 당하여 서울 집으로부터 영연(靈筵)을 받들고 온양군(溫陽郡)의 오천(梧泉) 옛 집으로 돌아왔다. 공의 이 때 나이는 56세였는데 예제를 지키기를 한결같이 앞서의 모친상과 같이 하였다. 복을 벗고는 과거를 포기하고 향리에 지내면서 상마(桑麻)를 살피고 화죽(花竹)을 가꾸었다. 매양 좋은 절서를 만나면 친척들을 모아 화수(花樹)의 모임을 이루어 술잔을 돌리고 시를 읊으면서 즐기는 가운데 시름을 잊었다.
기축년(1769, 영조 45)에 당시의 재신(宰臣)이 공이 명가의 자제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가장 낮은 벼슬 자리 하나도 얻지 못했다고 하여, 만녕전 참봉에 제수되도록 하였다. 이듬해 관례에 따라 선공감 부봉사에 올라 흠봉각(欽奉閣)에 황조(皇朝)의 칙서를 안치하는 일을 감독하였다. 일이 끝나자 봉사로 승진되었는데, 주상이 명하여 입시하게 하고 이조에 하교하기를,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양조(兩朝)를 배종하여 모두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는데, 어찌 심상한 낭관으로 볼 수 있겠는가.” 하고는 즉일로 한성부 주부에 임명하고, 6월에 이성 현감에 제수하니 특별한 대우였다.
이성은 대로에 접해 있었기 때문에 호족이 많았는데, 부임하자마자 백성의 해가 되는 폐단을 찾았다. 공이 부임하기에 앞서 양정(良丁)이 세력이 있는 집에 몸을 숨겨서 군액(軍額)이 많이 비어 징발하기 어렵기가 다른 읍보다 배나 되었으나 공은 조금도 남김없이 모조리 찾아내어 군액을 충당함에 빠뜨림이 없었다. 한 호족이 양민을 억지로 잡아 노비로 삼은 일이 있었는데 공이 그 간특한 사실을 적발하니, 한 고을이 통쾌하다고 칭송하였다. 풍년을 만나 돈이 귀해지면 자신의 봉급을 덜어서 결전(結錢)을 견감하고, 시장(試場)의 일을 맡게 되면 간약(簡約)을 따르기에 힘써, 한결같이 백성을 편하게 하려는 것으로 정사를 베풀었다. 그리하여 관직에 있은 지 5년 동안 폐단이 제거되고 일이 다스려졌으며 은혜와 위엄이 아울러 행해졌다.
갑오년(1774, 영조 50)에 공이 탄식하기를, “고인이 벼슬을 그만두는 치사(致仕 70세)의 기한이 명년인 노쇠한 나이에 관리의 일을 맡음이 어찌 평소에 바라던 마음이랴.” 하고, 드디어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이듬해 병이 들었는데 병이 위독해지자 친척을 불러 서로 결별하고 여러 자제들을 가르쳐 신칙하고 부녀자들은 물리쳐 나오지 못하게 하고 임종하였다. 곧 윤10월 20일이었으니 향년이 70세였다. 12월 을사에 전배(前配)와 합장했으니, 배방산(排方山) 임좌(壬坐) 언덕이었다.
공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간묵하였다. 어려서는 가정의 훈육을 받았고 자라서는 자제의 행실을 돈독히 하였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집안이 대대로 청빈했으나 부모를 받드는 음식은 부족하지 않았고, 상을 당해서는 슬퍼하는 실상과 상례의 절차가 모두 극진하였다. 모친께 고질이 있어 10년을 앓아 누웠는데 좌우로 부축하고 받들어 옷을 입은 채 띠를 풀지 않았고, 질병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에 피를 내어서까지 낫게 하고자 하였다. 모친이 일찍이 쇠고기 포를 즐겨 잡수셨는데 모친께서 돌아가신 뒤로는 늙도록 차마 먹지 못하였다.
조상을 받들기에 더욱 정성스러워서 날마다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 가묘에 배알하고, 기일을 당해서는 슬퍼하는 심정과 사모하는 정성으로 날을 마쳤으며 제수는 반드시 실정에 맞게 한 뒤에 그쳤다. 관직에 있을 때는 내외의 선대 기제와 묘사에 쓸 제수를 갖추어 보내면서 한결같이 넉넉하고 후하게 하여 읍의 형편이 쇠잔하고 빈약하다는 이유로 조금도 부족하게 하지 않았다. 공은 또 자신이 지손이기 때문에 정익공의 제사를 받들 수는 없었지만 비록 속절(俗節)이나 삭망(朔望)의 제사일지라도 반드시 제물을 갖추어 보내어 성의를 다하기에 힘썼다. 또 손수 선고(先稿) 8권을 쓴 것이 있는데 집에 간직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공이 어버이를 섬기고 선조를 향하는 정성은 천성으로 그러한 것이었다.
평상시에 거처할 때는 고요하게 스스로 지키고 출입이 드물었으며, 세상 사람들 가운데 교묘한 작태로써 시속에 영합하는 이를 보면 마치 자신이 더럽혀질 듯이 여겼고,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문정이 숙연하였다. 부친 양효공이 누차 여러 고을을 맡아 다스림에 평소에 청렴 결백을 바탕으로 삼았는데, 공이 받들어 따라서 조금도 더럽힘이 없었고 돌아오기에 미쳐서는 빌려서 생활함이 여전하였다.
전배는 사천목씨(泗川睦氏)이니 진사 천광(天光)의 따님이고 대사헌 임일(林一)의 손녀이고 좌의정 내선(來善)의 증손녀이다. 온화하게 부덕을 갖추어 가사를 주간하고 시부모를 섬기기에 한결같이 공(公)으로써 마음을 삼았다. 시부모를 받드는 의복과 음식을 반드시 몸소 마련하여 남의 손을 빌린 적이 없었으므로 추운 날에는 손등이 얼어터졌으나 수고롭게 여기지 않았다. 안색을 받들어 뜻을 따라서 항상 곁을 떠나지 않았으니, 모친이 일찍이 공에게 “나에게 한 며느리가 있지만 다른 사람의 열 며느리가 부럽지 않다.”고 하였다. 공보다 3년 먼저 태어나고 계해년(1803, 순조 3) 4월에 돌아가셨으니 향년이 41세였다. 슬하에는 3남 1녀를 두었다.
후배는 청송심씨(靑松沈氏)이니 택량(宅良)의 따님이다. 유순하고 가정을 잘 돌보았으며, 자녀가 없었으나 전배의 자녀를 어루만지고 사랑하기를 마치 자기 소생처럼 하니, 종당(宗黨)이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 경자년(1720, 숙종 46)에 태어나고 무신년(1788, 정조 12) 4월에 돌아가셨으니 향년이 69세였다. 공의 무덤 왼쪽에 봉분을 달리하여 안장하였다.
장남 극호(克浩)는 생원인데 한 딸을 두었으니 사위는 권세영(權世栐)이다. 다음은 제한(梯漢)인데 일찍 죽었고 재종질 낙수(樂叟)를 취하여 후사를 삼았다. 다음은 욱호(旭浩)인데 3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낙주(樂胄), 낙응(樂膺), 낙정(樂靖)이고 사위는 이양억(李壤億)이다. 딸은 이지한(李趾漢)에게 출가하여 한 아들 기숭(基崧)을 두었는데 관직이 수찬이다. 측실에서 난 한 아들은 길호(吉浩)이다. 내외의 손자ㆍ증손이 모두 약간 명이다.
다음에 명을 붙인다.

풍산의 주손이 선업을 이어 / 豊山之胄承先業
대대로 아름답게 전대를 빛내니 명성이 혁혁하네 / 趾美光前令聞赫
만년에 한 고을 맡아 치적이 훌륭했고 / 晩監一縣藹治蹟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본연의 뜻으로 돌아왔네 / 終焉投紱反初服
아름다운 숙인이 그 덕을 짝하니 / 有美淑人媲厥德
황천에서 함께 만난 곳 배방산 기슭일세 / 劒合重泉排方麓

 

 

   

通訓大夫行尼城縣監洪公墓誌銘 

 



鼎福少從儕友聞。有洪公誠彦。願與交而未幾病廢未果。今者公督上舍克浩持衰手家狀。來屬於鼎福曰。吾祖曾兩世墓銘。受之于星湖先生先。考幽堂之230_241a文。必欲求先生之徒而公其人也。願以爲請。鼎福辭不敢。而終不敢固辭。則上舍之意。不在于文。謹按公諱純輔。誠彦其字也。系出安東府之豊山縣。其先曰侃。號洪厓。仕麗朝。爲都僉議舍人。以文章直諫顯。八世而有諱履祥號慕堂。以經術文章。佐我宣廟。官大司憲。於公爲五世祖也。曾祖諱柱天。陽城縣監。贈左贊成。祖諱萬朝。判敦寧府。贈領議政諡貞翼。考諱重徵。行工曹判書。致仕奉朝賀。謚良孝。妣贈貞敬夫人東萊鄭氏。琱女。卽右議政懶菴彦信之後。公生于肅廟丙戌十一月。幼岐嶷不羣。貞翼公奇230_241b愛之。目之謂掌珠。年甫舞象。文詞日進。長益自勵爲學。騈儷對策之工。曺偶推重。癸丑登上庠。華聞大播。癸亥丁內艱。哀毁踰禮。葬。因廬墓下。朝夕哭莅。風雨不少廢。丙寅以後。發解者四。入選者三。而皆不中。人皆爲公惜之。辛巳遭外艱。自京第奉筵。還溫陽郡之梧泉舊墅。公時年五十六。守制一如前喪。制闋。廢擧業鄕居。問桑麻課花竹。每値令節。會親戚。爲花樹之會。飛觴吟賦。樂而忘憂。己丑。時宰以公爲名家子。未成一名。除萬寧殿參奉。翌年。例陞繕工監副奉事。監董欽奉閣。安皇朝勅書。事竣陞參。仍命入230_241c侍。敎銓曹曰。其父祖陪兩朝。俱入耆社。豈可以尋常郞官視之。卽日拜漢城府主簿。六月。除尼城縣監。異數也。縣當孔道多豪右。旣下車。訪弊之爲民害者。先是良丁投匿巨室。軍額多曠。徵攤倍他邑。公搜括不少饒。塡充無闕。有一豪族勒良産爲奴。公發其奸。一邑稱快。値年豊錢貴。則捐廩俸而蠲結錢。當試塲之役。則務從簡約。一以便民爲政。居官五年。弊祛事治。恩威幷行。歲甲午。公歎曰。古人致仕之期在明年。衰年吏役。豈素心哉。遂棄官歸。翌年感疾。疾革。招親戚與訣。敎勅諸子。屛婦女勿使前而卒。卽閏230_241d十月二十日。享年七十。十二月乙巳。合窆于前配排方山壬坐之原。公爲人端勅簡默。幼服家庭之訓。長敦子弟之行。性至孝。家世雖淸貧。而甘旨不乏。比喪。戚易俱盡。母夫人有痼疾。十載沉嬰。左右扶將。衣不解帶。疾谻。至血指以祈瘳。母夫人嘗嗜牛膊肉。丁憂以後至老不忍食。尤謹於奉先。日必冠帶謁廟。當諱辰。哀慕竟日。品羞必稱情而後已。在官時備送內外先世忌墓之需。一意豊腆。不以邑力殘薄而少替。自以支孫。不得奉貞翼公祀。雖俗節朔朝之奠。必備物以送。務盡誠意。又手寫先稿八卷。藏于家。盖其事親230_242a向先之誠。天植然也。平居恬靜自守。簡出入。視世之工爲時俗態者。若將凂己。終日端坐。門庭肅然。良孝公屢典字牧。素廉白。而公將順之。一塵不染。及歸。假貸猶前。配泗川睦氏。進士天光之女。大司憲林一之孫。左議政來善之曾孫。婉嫕有婦德。幹家事事尊章。一以公爲心。養親服食之物。必自爲之。未嘗倩人。當寒手皴坼。而不以爲勞。承顔順志。常不離側。母夫人嘗謂公曰。吾有一婦而不羡人之十婦也。生先公三歲。歿於癸亥四月。壽四十一。生三男一女。後配靑松沈氏。宅良之女。柔順宜家。無育。撫愛前配子女。如己230_242b出。宗黨稱其美。生於庚子。歿於戊申四月。壽六十九。祔葬公墓左異封。男長克浩生員。有一女婿權世栐。次梯漢早逝。取再從子樂叟爲後。次旭浩有三子一女。子樂胄,樂膺,樂靖。婿李壤億。女適李趾漢。有一子基崧。官脩撰。庶男一曰吉浩。內外孫曾若干人。銘曰。
豊山之胄承先業。趾美光前令聞赫。晩監一縣藹治蹟。終焉投紱反初服。有美淑人媲厥德。劒合重泉排方麓。



 

[주D-001]발해(發解) : 과거의 초시(初試)에 합격하는 것을 말함.
[주D-002]화수(花樹) : 원근의 친족들이 자주 한 자리에 모여서 골육의 정을 도탑게 하는 일을 말함. 위씨(韋氏)집의 일에서 유래하는데 명자(名字)는 알 수 없으나 옛날 위씨의 종회법(宗會法)이 있었음. 당(唐) 나라 잠삼(岑參)의 〈위원외화수가(韋員外花樹歌)〉라는 시가 있는데 흔히 종족의 모임에 화수(花樹)라는 말을 쓰는 것은 여기에서 유래함.


 

출처 :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글쓴이 : 낙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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