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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뢰동상예기(重牢東床禮記)-16世祖 홍명호

홍만식(뜸부기) 2018. 10. 7. 07:09

조선 후기의 문신 홍명호(洪明浩, 1736년~1819년)가 重牢東床禮를 행한 내용을 그의 조카 홍희준(洪羲俊, 1761년~1841년)이 기록한 책.

필사본. 1책 7장. 규장각 소장.


본서에 ‘重牢東床禮’란 결혼 60주년의 회혼을 맞이한 사람이 重牢宴을 치른 후에 자신보다 먼저 회혼을 맞이했던 사람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고 대접하는 예를 말한다. 

회혼을 기념하는 重牢宴과 결혼한 사람이 자신보다 먼저 결혼한 사람들을 대접하는 東床禮를 결합한 의식이다.

본서는 조카가 작은아버지의 重牢東床禮를 기록한 것으로‚ 작은아버지의 이름은 명시되지 않은 채 ‘季父判書公’이라고만 기록되어 있고‚ 조카의 이름은 ‘從子 羲俊’이라고 밝혀져 있다. 


본서의 서두에는 ‘聖上卽祚十年 己巳’라고 연대가 기록되어 있는데‚ 본서에 이름이 올라있는 사람들의 생몰년을 조사해 본 결과 이 해가 1810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純祖實錄≫을 검토한 결과 ‘洪羲俊’이라는 인물이 당시에 활동하였던 사실을 확인하였다.


≪萬姓大同譜≫<豊山洪氏條>에는 홍희준이 洪良浩(1724~1802)의 아들이며‚ 홍양호의 동생 중 洪明浩가 순조대에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홍명호의 생몰년은 본서에 기록된 ‘季父 判書公’의 나이와 일치한다.


본서에 기록된 重牢東床禮의 주인공은 홍명호이며‚ 그의 조카 홍희준이 예식의 내용을 정리하여 본서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홍명호는 본관이 풍산이고 자는 公舒‚ 시호는孝憲이다.


1771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순조대에 형조판서·예조판서·한성부판윤·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글씨를 잘 썼는데 대표작으로 수원의 <遲遲臺碑>가 있다.


홍희준은 홍양호의 큰 아들로서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첫째 부분은 본문에 해당하는 ‘重牢東床禮記’로서‚ 홍명호가 重牢東床禮를 설행한 전말과 예식에 초청되어 참여하였던 사람들의 이름·나이 등이 기록되어 있다.

두번째 부분은 重牢東床禮를 축하하는 내용의 글을 모은 것으로‚ 본서의 편자인 홍희준과 四從 菊翁‚ 그리고 重牢東床禮 참석자 중 한 사람인 趙尙鎭 등이 지은 3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고,


菊翁은 군수 홍이호(洪彝浩)로 추정된다.

 ‘重牢東床禮記’의 내용을 보면‚ 홍명호는 1810년 3월 18일 重牢宴을 하고 동년 8월 29일에 東床禮를 설행한 다음 홍희준에게 그 전말을 기록하도록 명하였다고 한다. 

東床禮에는 이미 重牢宴을 시행한 14명이 참석하였으며‚ 좌차는 관직에 상관 없이 나이순으로 하였다.


홍희준은 이 글에서 참석자들의 풍모가 마치 신선과 같았다고 말한 다음‚ 한 사람이 장수‚ 부귀‚ 부부간의 해로‚ 회혼 등을 모두 겸하는 것은 고금에 매우 드문 일로

 인력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인데‚ 이렇게 重牢東床禮를 실시하게 되었으니 개인적으로 매우 경사스러운 일이고 국가적으로도 아름다운 일이므로 이를 기록하여

후세에 영원히 전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본서에 기록된 東床禮 참석자들의 관직·성명·나이 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僉樞 鄭杆·牧使 李厚源(이상 77세)‚ 郡守 洪彛浩·左議政致仕 李敬一·牧使 李趾采(이상 76세)‚ 牧使 韓大裕(75세)‚ 季父 判書公(洪明浩‚ 74세)‚ 牧使 趙翼鉉·縣令 宋景載(이상 73세)‚ 判書 吳載紹

承旨 宋翼孝(이상 71세)‚ 判書 趙尙鎭·牧使 李勉輝·右議政 金思穆(이상 7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