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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조 홍차기효자비(洪此奇孝子碑)를 만나다

홍만식(뜸부기) 2020. 6. 6. 14:24

 

 

 

 

 

효자 홍저한(洪著漢 ) 일명 차기(此奇) 효자비각을 찾았다.

사정공계 감사공후예의 묘역에 안장되어있어 성묘를 했다.

충주감사공파의 입향조이신 14세조 홍문관교리를 지내신 휘 중현(重鉉)의 손자인 홍차기의 효행은 다음과 같다.

80세를 훨신 넘기신 수희님의 안내로 효자비각 안에 들어가 사진 촬영을 할 수 있게되어 참으로 다행이다.

탁본을 떠서 대종회 사무실 또는 풍산홍씨 기념관에 보존하여 종친들께 널리 알리고자 한다.

찿아가는길: 충북 충주시 가신1길27-9(용화사)를 이정표삼으면 찾기 쉽다.

 

홍차기효자비(洪此奇孝子碑)

 홍차기(1759~1772)는 자가 양여로 교리 홍중현(洪重鉉 : 1660~1726)의 손자요, 인보(寅輔)의 아들이다. 살인죄로 옥에 갇힌 아버지의 구명을 위해 충주와 서울을 왕래하며 신문고를 울리고 임금에게 호소하였다. 아버지는 목숨을 구했으나 결국 홍차기는 열네살로 죽고 말았다. 당대의 석학인 홍양호(洪良浩)가 전기를 썼고 후일 충주목사로 온 이가환이 글을 써 비석을 세웠다. 뒷면에는 아버지가 쓴 명()이 새겨져 있다. 충주시 노은면 가신리에 있다.

 

 

 

효자풍산홍차기비(孝子豊山洪此奇碑)

 

홍씨(洪氏)성의 동자는 아름이 차기(此奇), 아버지는 인보(寅輔)인데 법에 걸려 한달에 세 번 곤장을 맞아서 살 속이 터질 정도였는데 아이가 막 밥을 먹다가도 용하게 알고 부르짖으며 뒹구르니 마치 약속한 듯 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원통함을 호소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눈물이 마르고 피가 다하여 목숨이 쇠약해지더니 마음속 응어리가 받아들여지는 것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객지에서 죽어 돌아 왔다.

아이가 이에 표연히 아버지에게 하직 인사도 하지 않고 몰래 올라가 신문고를 울리고 여러 해 동안 대월 문을 지키고 있었다. 봉두난발을 하고 다리에는 굳은살이 박이니 보는 사람들이 탄식하고 혹은 먹을 것을 주기도 하고 머리의 이와 서캐를 잡아 주기도 하였다.

이 해에 큰 가뭄을 만나 혹시 죄가 의심스러운 죄수가 있을 까 걱정하였는데 대신이 이를 말하자 왕은 ! 본도에 명령을 내려 증거가 없는 말인지 깨끗하게 살피라.”고 하셨다.

아이는 자기 힘을 헤아리지도 않고 분주히 다니며 역마가 갈 때나 역마가 올 때나 모두 앞장을 섰는데 90리도 이르기 전에 병이 이미 위독한 상태였으나 기어서 대궐에 나아가 임금의 자비를 구하였다. 은혜로운 말씀이 비로소 내려왔지만 기운은 실낱과 같았다. 옆에 있는 사람이 읽어주니 듣고서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아버지! 아버지! 살게 되었습니다.”라 하고는 잠시 후 눈을 감고 마침내 죽고 말았다.

아버지가 옥에 들어갈 때 아이는 태중에 있었고 아버지가 옥에서 나옴에 이르러서는 아이가 상여에 있었다. 14년간 하늘이 실로 쇠퇴한 풍속을 안타깝게 여겨 그로 하여금 붙잡아 지탱하도록 한 것이니 아! 슬프구나, 사람의 모범이 여기에 있도다.

 

지금 임금(정조) 19년 을묘(1795) 10월 일

자헌대부 행 충주목사 여흥(驪興) 이가환(李家煥)이 글을 짓고 쓴다.

 

아버지가 명()하기를,

 

그 어머니와 그 아들이여, 대궐문을 지키고 호소하여

남편을 살리고 아버지를 살렸으니 하늘이 열녀와 효자를 내려 보냈구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되 비로소 작은 비갈을 세우니

이 누구의 힘인가? 금대(錦帶 : 이가환의 호)가 아랫사람을 돌보아 주셨구나.

덕은 산처럼 높고 은혜는 바다처럼 넓어라.

네 아비의 마음은 비석과 함께 우뚝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