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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무원종공신 공조판서 홍중징 묘지명 -성호 이익-

홍만식(뜸부기) 2016. 12. 13. 21:19
공조 판서 치사 봉조하 오천 홍공 묘지명 병서〔工曹判書致仕奉朝賀梧泉洪公墓誌銘 幷序

 



예전에 내가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내고 정익(貞翼)이라는 시호를 받은 홍공(洪公)의 묘갈명을 외람되이 지은 기억이 난다. 공의 막내아들 공조 판서 치사공(致仕公)이 졸하여 장사를 지낸 뒤에 그 효자 생원(生員) 순보(純輔)가 먼 고을로부터 상복 차림으로 찾아와서 묘지명을 부탁하니, 내가 감히 사양할 수가 없다.
살펴보건대, 공은 풍산(豐山)의 세가(世家)이니, 시조 지경(之慶)은 고려조(高麗朝)에 벼슬하여 관직이 국자 직학(國子直學)에 이르렀다. 그 아들 휘 간(侃)은 지제고(知制誥) 벼슬을 하였고 호가 홍애(洪厓)이니, 문집이 세상에 전한다. 후에 벼슬한 분이 대대로 이어지다가 휘 이상(履祥)이 있었으니, 경술(經術)로 우리 목릉(穆陵 선조(宣祖))을 섬겨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호는 모당(慕堂)이요, 문봉서원(文峯書院)에 배향되었으니,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 휘 탁()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부사(府使)를 지내고 좌참찬에 추증되었고, 조부 휘 주천(柱天)은 현감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만조(萬朝)는 바로 정익공이니, 세상에서 명절과 덕망을 완비한 분으로 일컫고 있다.
모친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돈녕부 봉사(敦寧府奉事)를 지내고 이조 참의에 추증된 진(瑱)의 따님이요, 부마(駙馬) 길성위(吉城尉) 대임(大任)의 손녀이다. 뒤에 정경부인(貞敬夫人)의 봉작을 받았다. 임술년(1682, 숙종8) 겨울 12월 14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초명(初名)은 중흠(重欽)이었다. 어렸을 때에 꿈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말하기를, “어찌하여 ‘징(徵)’으로 이름을 쓰지 않는가. 훗날에 반드시 크게 현달하리라.” 하였는데, 정익공이 이 이야기를 듣고 중징(重徵)으로 개명토록 하고 자를 석여(錫余)로 지었다고 한다.
공은 기국과 도량이 진중하고 원대하여 장난치고 노는 나이에 이미 촉망을 받았다. 정익공이 무릎 위에 앉히고는 공을 노룡(老龍)으로 지목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집안을 크게 일으킬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 하였는데, 마침내 문장에 진력하니, 뭇사람들이 미치기 어려운 공의 필력(筆力)에 굴복하였다.
신묘년(1711, 숙종37)에 진사가 되었고, 3년 지난 계사년(1713)에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규례대로 군자감 직장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에 장악원으로 옮겨졌다.
을미년(1715)에 전적(典籍)으로 있다가 병조 좌랑에 제수되고, 또 그날로 지평에 의망(擬望)되었으니, 세상에서 이른바 통청(通淸)이라는 것이다. 가을에 대부인(大夫人)의 상을 당하였다. 정유년(1717)에 용인 현감(龍仁縣監)으로 나갔으니, 부친을 봉양하기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당시에 상공 최규서(崔奎瑞)가 벼슬에서 물러나 그 고을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사람을 대할 때마다 노상 공을 칭찬하기를, “내가 이 고을에 거주한 뒤로, 읍재(邑宰)가 된 자로서 실제에 힘쓰고 명예를 구하지 않는 자는 오직 이 사람뿐이다.” 하였다. 경자년(1720)에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임인년(1722, 경종2)에 병조정랑 지제교(兵曹正郞知製敎)에 제수되었다. 병조의 아전 중에 은총을 믿고 간교한 짓을 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에게 발각되었다. 관장(官長)이 기필코 비호하려고 하였으므로 공이 다투어도 소용이 없었다. 이에 즉시 정사(呈辭)하여 그만두고자 하니, 관장이 뉘우치고 사죄하였고 마침내 법대로 처리될 수 있었다.
계묘년(1723, 현종3)에 외직으로 나가 삭녕 군수(朔寧郡守)가 되었다. 다음 해에 체차되어 돌아왔다. 또 이듬해 가을에 장령에 제수되었다가 사복시 정으로 옮겨졌다. 겨울에 정익공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무신년(1728, 영조4) 봄에 상기를 마치자 또 장령에 제수되었다. 당시 고향 집에 있었는데, 나라에 역란(逆亂)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졸지에 듣고는 달려가 임금에게 문후하기 위해 즉시 길을 떠났다. 길을 우회해 가며 난관을 뚫고 도성에 득달해서는 곧장 입궐하여 숙배한 뒤에 도로에서 들은 바를 진달하였는데, 창졸간에 질문에 따라 적절히 응답하였는데도 핵심을 짚어 낸 것이 많았으므로 상이 자못 가납하였다. 당시에 국옥(鞫獄)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는데 적괴가 몰래 달아나 숨자 공은 여러 대신(臺臣)들과 소장을 올려 역적이 체포되기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파가저택(破家瀦澤)과 노적(孥籍)의 형전(刑典)을 시행하기를 청하였다. 여름 4월에 상이 애통해하는 교서(敎書)를 내렸는데, 간곡하고 안타까워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공이 역란이 일어나게 된 근본 원인을 파헤쳐 아뢰기를,
“양역(良役)을 변통(變通)하는 문제는 전후의 연대(筵對)에서 발언한 것이 매우 많았지만 끝내 하나로 귀결되지 못하여 그대로 답습하면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방치해 두고 있습니다.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도는 백성들이 서로 이끌어 도적의 소굴로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백성을 편안히 하는 계책은 수령을 잘 고르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으니, 수령이 적임자가 아니면 전하께서 아무리 날마다 덕음(德音)을 내리더라도 결국에는 여리(閭里)에까지 파급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당시 궁가(宮家)의 절수(折受)와 여러 도(道)의 물선(物膳) 및 승여(乘輿)나 복식(服飾) 등의 도구와 백사(百司)의 시급하지 않은 비용을 혁파하라는 명이 내렸다. 공이 또 이로 인하여 근원적인 처방에 대해 논하면서 권면하여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천하의 일은 임금의 일심(一心)에 근본하니, 천리(天理)와 인욕(人慾)이 호리(毫釐)에서 나뉘지만 국가의 존망이 여기에 매여 있다고 합니다. 근일의 일을 놓고 보건대, 이는 바로 천리가 발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참으로 이 같은 마음을 항상 지니고 이를 확충하여, 난역이 이미 평정되어 생민(生民)들이 다소 안정되었다고 하지 마시고 의리로써 재단하실 수 있다면, 옛말에 이른 바 ‘깊은 근심이 성군을 만들고, 많은 어려움이 나라를 일으킨다.’라는 것이니,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입니다.”
하였는데, 뒤에 비지(批旨) 가운데에 이 대목을 거론하면서 특별히 칭찬한 것이 세 차례나 되었다. 7월에 종부시 정으로 있다가 순천 부사(順天府使)에 제수되었다.
경술년(1730, 영조6)에 인수(印綬)를 풀어놓고 돌아와 오촌(梧村)에 터를 잡고 살면서 오천(梧泉)이라 자호하였다.
정사년(1737)에 사성(司成)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파직되었다. 무오년(1738, 영조14)에 장악원 정에 제수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나갔다. 제주는 옛날의 탐라국(耽羅國)이니, 남쪽의 아주 먼 바다 가운데에 있다. 지역이 멀고 일이 번다하여 사람들이 대부분 기피하였는데, 공은 명을 받고는 부임하여 당무(當務)에 마음을 다 쏟으니, 섬 백성들이 편안해하였다. 기미년(1739) 가을에 체차되어 돌아왔다.
경신년(1740)에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외직으로 나가 봉산군(鳳山郡)에 보임되었고 또 그 이듬해에 파직되어 돌아왔다.
정묘년(1747) 여름에 은대(銀臺 승정원)에 들어갔다. 뒤에 연이어 장연(長淵)과 영해(寧海) 두 고을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겨울에 또 은대에 들어갔다. 응제(應製)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초모(貂帽)를 하사받았다. 가을에 한성부 우윤에 발탁되었다. 경오년(1750)에 또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계유년(1753)에 특별히 호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상이 공의 노쇠한 모습을 보고는 섭양(攝養)을 잘하도록 하고, 또 등과한 해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은 올해 나이가 일흔둘이고, 계사년(1713, 숙종39)에 등과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기억하기로, 옛날 계사년에 어용(御容)을 받들고 강도(江都)로 들어갈 때에 경의 선친이 경기 감사로서 배행했었다. 경은 그해에 등과한 것이다.”
하고, 이어 승지에게 전교를 쓰라고 명하고 특별히 지중추부사에 제수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선조(先朝)께서 연로하고 덕망 있는 신하를 생각하여 일찍이 경의 선친과 한두 신하를 인견(引見)하시면서 몸소 옥음(玉音)을 내어 말씀하기를, ‘경들이 왔는가?’ 하였는데,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이 하교를 생각할 때마다 서글픈 감회를 이기지 못하겠다.”
하였다. 공은 이어 사은숙배하고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그 이튿날 영수각(靈壽閣)의 어첩(御帖)을 봉심(奉審)하였다.
갑술년(1754, 영조30) 봄에 공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당시 선원전(璿源殿)을 개수(改修)하고 있었으므로 빨리 전내(殿內)에 입시하라는 명이 있었다. 상이 또 이르기를,
“계사년(1713, 숙종39)에 어용을 받들고 강도로 들어갈 때에 경의 선친이 배행했었는데 경이 그해에 급제하였다. 지금 또 진전(眞殿)을 개수하는 일에 참여하였으니, 희귀한 일이다. 내가 특별히 제수한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어서이다.”
하였다. 그날 밤에 선온(宣醞)하여 세 차례 행주(行酒)하였는데, 상이 별도로 2작(爵)을 하사하여 다시 은근한 뜻을 보였다.
병자년(1756) 가을에 내전(內殿)의 하교를 받들어 기로소의 신하들에게 음식을 하사하고 초상을 그려 첩(帖)으로 만들어 기로소에 보관하도록 명하였다.
무인년(1758) 겨울에 상이 기로소의 신하들을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먼저 《대학(大學)》의 1장(章)을 읽고 신하들에게 차례대로 읽도록 명하고 이르기를, “이는 걸언(乞言)하는 뜻이다.” 하였는데, 공이 이로 인하여 진달하기를, “본래 밝은 덕은 인욕에 의해 흐려지지 않습니다.”라고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 읽은 것을 아직까지 이해하고 있는가?” 하였다.
경진년(1760, 영조36)에 이르러 또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 아래에 모이라고 명하였다. 액례(掖隷)로 하여금 부축하여 섬돌을 오르게 하고 음식을 하사하였다. 일이 끝나자 상이 친히 어제(御製)를 써서 기각(耆閣)에 현판으로 걸고 또 그림을 그려 첩을 만들도록 명하고서 여러 신하에게 반사하였다. 공이 출반(出班)하여 아뢰기를,
“선신(先臣)이 누차 치사(致仕)를 청하였건만 허락해 주시는 은혜를 입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신이 몹시 늙어 귀도 들리지 않고 눈도 보이지 않는 몸으로 침묵한 채 지금에 이르렀으니, 만약 신의 딱한 처지를 헤아려 주시는 은혜를 입는다면 미처 펴지 못한 선신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에 공에게 물러나 쉬는 것을 허락하고 다달이 쌀과 고기를 보내도록 하였으며, 여덟 구로 된 시를 친히 써서 내렸다. 공이 앞으로 나아와 공경히 받고서 물러나니, 보고 듣는 이들이 모두 놀라워하였다. 공이 정익공(貞翼公)의 사당에 고유제(告由祭)를 올리고 집안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제는 나의 소원을 다 이루었다.” 하였다.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한 채 매화와 대나무에 뜻을 부쳐 세월을 보내면서 탄신일이나 문후할 일이 있으면 때때로 병구를 이끌고 반열에 참석하였다.
신사년(1761)에 나이가 여든에 차서 규례에 따라 품계가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올랐다. 4월에 또 음식물과 옷감을 하사받았다. 7월 19일 미시(未時)에 가벼운 병(病)으로 도성 서쪽의 빌린 집에서 고종명하니, 향년 80세였다. 부음이 아뢰어지자, 이틀 동안 정조시(停朝市)하고 조제(弔祭)하며 장례를 돕는 것을 규례대로 하였다. 동년 10월에 용인(龍仁) 하동촌(下東村)에 장사 지냈는데, 자리가 좋지 않은 것으로 인하여 온양(溫陽) 자은교(自隱橋)에 있는 정익공의 무덤 동쪽 신좌(申坐)의 언덕으로 개장(改葬)하였다.
공은 자품(資稟)이 중후하고 흉회가 대범하여 아무리 경황없고 다급한 때라도 일이 없는 듯 태연하였다. 그렇지만 조정에 선 40년 동안 일을 만나면 곧장 앞으로 달려 나가 꺾이거나 굽히는 일이 없었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격의 없이 웃고 이야기하였다. 누차 주군(州郡)을 맡았지만 가산이 빈한한 것이 여느 선비의 집안과 다를 게 없었다. 규모(規模)는 대체(大體)를 견지하는 데에 힘썼으니, 공평한 마음으로 남의 처지를 헤아려 노여운 목소리와 표정으로 꾸짖지 않았다. 일찍이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내게 다른 장점은 없다. 사마공(司馬公 사마광(司馬光))이 말한, ‘평생토록 남에게 말하지 못할 일을 한 적이 없다.’라고 한 것에는 혹 가까울 수도 있다.” 하였다.
어버이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공적인 일이 아니면 반드시 어버이 곁에 있었다. 만년에 지은 집이 옛날 집과 다소 떨어져 있었는데 밤에는 반드시 어버이가 주무시기를 기다린 뒤에야 물러 나왔고, 새벽닭이 울면 문득 동복(童僕)으로 하여금 가서 어버이가 편안하신지를 시침(侍寢)했던 사람에게 알아보게 하였다. 새벽에 일어나 소세하고 문안드리는 것을 매일 한결같이 하였다. 작은누님이 일찍 과부가 되자 특별히 어버이의 마음을 생각해서 보살펴 주었다. 누님이 귀녕(歸寧)했을 때에 역질에 걸려 증세가 매우 위중하였으므로 온 집안 식구가 역질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접(移接)하였다. 공은 차마 누님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정익공에게 청하고서 떠나지 않고 홀로 남아 몸소 약시중을 들었다. 그렇지만 이내 불행히 목숨을 잃으니, 치상(治喪)에 예를 다하고 빈렴을 마친 뒤에 비로소 나왔는데, 공은 끝내 무사하였다.
조상을 받드는 도리는 늙어 갈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기제(忌祭) 때에는 변두(籩豆)에 올릴 제품(祭品) 일체를 집안사람들을 지휘해 가며 일일이 점검하고 살펴서 정례(情禮)에 흡족하게 된 뒤라야 마음이 편안하였다.
문장은 완곡하고 넉넉하여 고심해 가며 어렵게 지은 태가 없었으니, 그 체재와 격식은 구양자(歐陽子 구양수(歐陽脩))로부터 얻은 것이 많았다. 만년에는 《역(易)》에 대한 연구가 정밀하여 그에 관한 저술로 《완락편(玩樂編)》 3권, 《규반록(窺斑錄)》 1권, 《경사증역(經史證易)》 2권, 《좌역참증(左易參證)》 2권이 있고, 또 《사평(史評)》 2권과 시문 약간 권(卷)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학생(學生) 조(琱)의 따님이니, 통정대부 군수(郡守) 하(何)의 증손녀요, 나암(懶菴) 상국(相國) 언신(彥信)의 후손이다. 기미년(1679, 숙종5) 8월 13일에 태어나 계해년(1743, 영조19) 4월 6일에 별세하였다. 정경부인에 추봉(追封)되었다. 성품과 행실이 정숙하여 종족들이 그 아름다움을 칭찬한다. 공의 무덤에 부장하였다.
아들과 딸을 각각 하나씩 낳았으니, 아들 순보(純輔)는 생원이고, 딸은 사인(士人) 목성리(睦聖履)에게 시집갔다.
순보는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 계한(桂漢)은 딸 둘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차남 제한(梯漢)은 문장과 행실이 있었으나 요절하여 재종형(再從兄) 수한(授漢)의 아들 낙수(樂叟)를 후사로 삼았다. 막내 욱한(旭漢)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어리다. 딸은 사인 이지한(李趾漢)에게 시집가서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이백숭(李百崧)이다. 백숭은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다. 목성리는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목조흥(睦祖興)이다. 목조흥은 딸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다. 딸은 사인 강윤겸(姜允謙)에게 시집갔다.
이어 생각해 보니, 내가 공과 즐겁게 사귀었는데 나이는 내가 한 살이 더 많다. 비록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마음만큼은 거울이 비추듯 서로 통하여 어제 본 듯하였다. 성인께서 말씀하기를, “친구를 버리지 않으면 백성들이 각박해지지 않는다.” 하였으니, 공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내가 머리가 다 빠지도록 죽지 않고 있다. 비록 억지로 붓을 들어 글을 짓고자 하나 이미 정신이 나가 글자를 이루지 못하니, 이는 유명(幽明) 간에 마음을 저버린 것이다. 다만 본래의 가장에 의거하여 묘지명을 짓기를 평소 주고받는 편지글처럼 하였을 뿐이니, 공이 만약 영혼이 있다면 필시 지상에서 괴로워하는 나를 비웃을 것이다.

선비는 중후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 士不可以不重
중후하면 위엄이 있게 마련이라오 / 重必有威
위엄이란 사물의 작용이니 / 威者物之用也
마치 반석이 스스로 견고하매 사람들이 그 움직이기 어려움을 아는 것과 같다오 / 如盤石自固而人知其難動
공이 만년에 영광과 은총을 입은 것은 / 公之晩年遭逢光寵
사람 때문이 아니라 길몽 때문이라오 / 匪人也維吉有夢

 

工曹判書致仕奉朝賀梧泉洪公墓誌銘 幷序 

 


記昔瀷猥撰判敦寧府事贈諡貞翼洪公阡銘。公之季子工曹判書致政公卒旣葬。其孝子生員純輔自遠郡憂服來訪。託以幽竁之誌。瀷不敢辭也。按公豐山世家。始祖200_119b之慶。仕高麗官至國子直學。子諱侃官知制誥號洪厓。有集行于世。後世襲圭組。有諱履祥。以經術事我穆陵。官至大司憲號慕堂。配享文峯書院。寔公之高祖也。曾祖諱。官通政府使贈左參贊。祖諱柱天。官縣監贈左贊成。考諱萬朝。卽貞翼公是也。世稱完名全德。妣安東權氏。敦寧府奉事贈吏曹參議瑱之女。駙馬吉城尉大任之孫也。後封貞敬夫人。以壬戌冬十二月十四日生公。初名重欽。幼時夢一神人謂曰何不以徵名。後必大顯。貞翼公聞之。命改以重徵字錫余云。公器度凝遠。遊戲已屬望。貞翼公置膝上。指爲老龍曰大吾家者必此兒也。遂肆力文200_119c苑。衆服筆力之難及。辛卯成進士。越三年癸巳。擢文科第三名。例授軍資直長。俄換掌樂院。乙未由典籍拜兵曹佐郞。又於當日注望持平。世所謂通淸也。秋丁大夫人憂。丁酉出監龍仁縣。爲便養也。時崔相奎瑞退居邑中。每對人稱道云自吾之居此邑。爲宰者務實不要譽。惟此人也。庚子棄官歸。壬寅除兵曹正郞知製敎。曹吏有恃恩售奸者爲公所發。官長必欲掩護。公爭不能得。卽呈辭欲遞。官長慙悔摧謝。卒如法。癸卯出涖朔寧郡。翌年遞歸。又明年秋除掌令。移司僕正。冬丁貞翼公憂。廬墓三年。戊申春服闋。又拜掌令。時在鄕廬。猝聞國有逆亂。卽發奔問之行。迆200_119d路艱關。得達輦下。直入闕肅命。以道路所聞陳疏。倉卒應變。事多中窾。上頗嘉納焉。時鞫獄方張。賊魁逃躱。公與諸臺陳章。請不待賊之就捕。先施瀦宅孥籍之典。夏四月上下哀痛之書。辭旨懇惻。公因推本生亂之源曰。良役變通一事。前後筵對。發言盈庭。終未得其一定。因循姑息。一任吾民之塡壑。彼流離轉徙之民。相率而投入賊藪宜矣。寧不寒心。然安民之策。莫先於擇守令。苟非其人。殿下雖日降德音。終無以下究於蔀屋矣。時有命罷宮家折受。諸道物膳及乘輿服飾之具。百司不急之費。公又因此爲溯源之論。加勉云臣聞天下事。本於人主一心。200_120a天理人欲。分於毫釐。而國家之存亡繫焉。試以近日事觀之。卽天理之所發。殿下誠能恒持此心。擴而充之。勿謂寇亂之旣平。而生民之粗集。裁以義理。則古所謂殷憂啓聖。多難興邦。卽此其大機會也。後批旨中擧此段。特示奬許者三。七月自宗簿正除順天府使。庚戌解紱歸。卜居于梧邨。自號梧泉。丁巳除司成。以病罷。戊午除掌樂院正。未幾出爲濟州牧。濟古耽羅國。在極南大海中。地遠事繁。人多厭避。公則承命赴任。盡心當務。島民安焉。己未秋遞歸。庚申拜刑曹參議。明年出補鳳山郡。又明年罷還。丁卯夏入銀臺。後連除長淵,寧海兩邑。辭不赴。明年冬又入200_120b銀臺。應製居魁。有貂帽之賜。秋擢拜漢城右尹。庚午又拜刑曹參判。癸酉特授戶曹參判。上見衰老。使之引年。又問登科之歲。對曰臣今年七十二。登科於癸巳歲。上曰予記昔癸巳。奉御容入江都。先卿以京畿監司陪行。卿蓋以其年登科矣。仍命承旨書傳敎。特除知中樞府事。又敎曰先朝眷念耆舊之臣。嘗引接先卿及一二臣。身出玉聲曰卿等來耶。言猶在耳。每念此敎。不勝感愴。仍行肅謝。以國朝故事入耆老所。翌日奉審靈壽閣御帖。甲戌春拜工曹判書。時方修改璿源殿。促令入侍於殿內。上又曰癸巳奉御容入江都。先卿陪行。卿以是年及第。今又200_120c來參眞殿修改之役。事涉稀貴。吾之特除。意有在也。是夜宣醞。酒三行。上別賜二爵。更致慇懃之意。丙子秋。承內殿下敎。宣饌於耆社諸臣。命圖像作帖。藏于耆社。戊寅冬召見耆社諸臣。上先讀大學一章。命諸臣以次讀之曰。此乞言之義也。公因陳本明之德。不爲人欲所昏。上曰舊讀尙能領會耶。至庚辰。又命會於明政殿月臺下。使掖隷扶上階。宣饌訖。上親書御製。懸板於耆閣。又命圖畫作帖。頒賜諸臣。公進奏曰先臣屢請休致。未蒙恩許。今臣癃病聾瞶。泯默至今。儻蒙矜諒。可以遂先臣未伸之志。上於是許公退休。月致米肉。親書八句詩以下。公200_120d進前擎受而退。瞻聆俱聳。公具由祭告於貞翼公祠宇。言于家人曰。今則吾志願畢矣。杜門謝客。寓意於梅龕竹塢。以送日月。惟於誕彌之辰。起居之班。時時扶病入參。辛巳以年滿八十。例陞崇祿階。四月又受食物衣資之賜。七月十九日未時。以微恙考終于城西僦舍。享年八十。訃聞停朝市二日。弔祭庀葬如例。以是年十月葬于龍仁下東邨。因卜兆不利。改葬于溫陽自隱橋貞翼公墓東申坐之原。公資稟厚重。胷襟坦蕩。雖當蒼黃急遽之際。安若無事。然立朝四十年。遇事直前。無所撓屈。對人言笑。不設畦畛。屢典州郡。產業淸寒。無異匹士之家。規模務持大體。平200_121a心恕物。不加聲色。嘗自謂曰吾無佗長。其於司馬公所謂平生所爲。無不可向人言者。或庶幾焉。其於事親之節。非公故則必在親側。晩營居第。稍間於舊宅。夜則必待親就眠而後退。雞鳴則輒使僮指進探安否於侍寢之人。昧爽而起。盥潄省候。日以爲常。次姊早寡。特爲親意撫憐。歸寧之日。遘癘忒重。渾舍移避。公不忍離捨。請于貞翼公。獨留不去。親執藥餌。旣而不幸則治喪盡禮。旣殯而後始出。公卒無事。奉先之道。老而彌篤。喪餘之日。凡籩豆之實。一皆指揮家人。一一照管。有以稱愜情禮。然後始安於心。爲文婉曲紆餘。絶無艱難辛苦之態。其體段得於歐陽子者爲200_121b多。晩年硏精於易。所著有玩樂編三卷,窺斑錄一卷,經史證易二卷,左易參證二卷。又有史評二卷。詩文若干卷。藏于家。配東萊鄭氏學生琱之女。通政郡守何之曾孫。懶菴相國彥信之後。生於己未八月十三日。圽於癸亥四月初六日。追封貞敬夫人。性行貞淑。宗族稱其美。祔葬公塋。生男女各一人。男純輔生員。女適士人睦聖履。純輔生三男一女。男長桂漢。生二女俱幼。次梯漢有文行早夭。取再從兄授漢之子樂叟爲後。次旭漢有一女幼。女適士人李趾漢生一子百崧。百崧生一子幼。睦聖履生一男一女。男祖興。祖興生一女幼。女適士人姜允謙。仍念瀷與公交懽。年200_121c較一歲之多。雲泥雖遠。心鏡相照如一日。聖人曰故舊不遺則民不渝。公之謂矣。瀷髮禿不死。雖欲強筆草成。精魂已喪。不能成字。是負心於幽明。只據本狀爲此。如常日往來竿尺而已。公若有知。必笑地上之艱苦矣。銘曰。
士不可以不重。重必有威。威者物之用也。如盤石自固而人知其難動。公之晩年遭逢光寵。匪人也維吉有夢。


 

[주D-001]노룡(老龍) : 문원(文苑)의 대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송대(宋代) 용도각(龍圖閣)의 직각(直閣)을 소룡(小龍), 직학사(直學士)를 대룡(大龍), 학사(學士)를 노룡이라 했던 데에서 온 말이다. 《泊宅編 卷上》
[주D-002]역란(逆亂) : 영조 4년(1728)에 일어난 무신란(戊申亂)을 가리킨다. 이인좌(李麟佐), 박필현(朴弼顯), 정희량(鄭希亮)의 주도로, 독살된 경종(景宗)의 원수를 갚고 밀풍군(密豐君) 이탄(李坦)을 추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무력에 의한 정권 찬탈을 기도한 반란이다. 충청 병사 이봉상(李鳳祥)을 죽인 다음 진천(鎭川), 안성(安城), 죽산(竹山) 등으로 진격하였으나, 용인(龍仁)에 은거 중이던 최규서(崔奎瑞)의 고변(告變)으로 출동한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에 의해 대패하였으며, 이인좌는 죽산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참형에 처해졌다. 《이성무, 조선왕조사, 동방미디어북스, 2002, 776~780쪽》
[주D-003]애통해하는 교서(敎書) : 무신란이 평정된 뒤에 중외(中外)의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기로(耆老), 군민(軍民)에게 내린 교서를 가리킨다. 《英祖實錄 4年 4月 22日》
[주D-004]걸언(乞言) : 옛날에 임금이 나이 많고 덕이 높은 원로들에게 때때로 술자리를 베풀어 가르침을 청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와 〈내칙(內則)〉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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