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홍방(1573년~1638년)의 시문집.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경망(景望), 호는 지계(芝溪).
홍우전(洪禹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수(洪脩)이고, 아버지는 홍이상(洪履祥)이며, 어머니는 김고언(金顧言)의 딸이다.
문음으로 출사했으며, 부수찬, 교리, 필선, 장령, 경상도관찰사, 안변부사등을 역임했으며, 1604년(선조 37) 은산현감으로 재직 중 평안도어사 신율(申慄)의 서계에서, "몸가짐이 청근하고 처사가 상명하다."는 평을 들었다.
이듬 해인 1605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0년(광해군 2) 11월에 지평이던 그는 동료들의 인혐에 대한 처치를 지체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체차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연간에는 주로 공조·병조좌랑, 정언·전적, 세자시강원사서, 지평·문학·수찬·부교리·부수찬·교리·필선·장령 등 주로 언관직을 지냈다.
세자시강원문학, 지제교로서 『선조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그리고 외직으로는 개성유수를 지낼 때 경기도와 강원도에서만 시행하던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해 방납의 폐 등을 없애고자 하였다. 그러나 부호들의 반발로 1633년(인조 11) 11월에 폐지되었다.
1621년(광해군 13) 정시의 시관으로 참여할 때, 영의정 박승종(朴承宗)과 이이첨(李爾瞻)의 알력다툼으로 이이첨의 당 한 사람만이 급제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과거의 부정을 주장하며 이정구(李廷龜)·김신국(金藎國) 등과 함께 치죄를 요구당하기도 하였다.
인조대에는 외직으로 경상도관찰사를 지냈으며, 1624년의 안변부사 당시에는 지릉(智陵) 화재사건으로 추고되었다.
1619년에는 동지사로, 1628년(인조 6)에는 중국 희종황제의 죽음에 대한 진향사 겸 진하사로 두 차례 중국을 다녀왔다.
그 뒤 대사간·도승지를 거쳐, 1635년(인조 13) 부제학이 되었다.
이 때 그의 아들 홍주일(洪柱一)이 부수찬이 되어 부자가 동시에 홍문관의 관직을 차지하는 가문의 영광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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