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홍철주(洪澈周, 1834년~1891년)가 1888년에 제정한 한국 최초의 電信規程.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경함(景涵). 호는 송사(松史), 시호는 효헌(孝獻), 거주지는 서울.
고조부는 경주부윤 홍감보(洪鑑輔), 증조부는 감역 홍선호(洪善浩), 조부는 홍의명(洪義命), 부는 봉사 홍일모(洪一謨)이고, 생부는 홍술모(洪述謨)이다.
1859년 진사로서 증광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66년 조정에서는, 갈수록 심해지는 지방의 간리(奸吏)·토호 들의 탐학 행위를 철저히 파악하여 징계하기 위해 경기·경상·전라·공충도(公忠道)에 일제히 암행어사를 파견하였다.
이때 공충도에 파견되어 백성들로부터 철저히 수소문하여 백성들을 괴롭혔던 토호들을 파악하여 죄를 주고, 수령 중 선행을 행한 자와 실정한 자를 파악, 보고하였다.
그 공으로 1867년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1875년 안동부사로 있을 때 울산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유리(由吏) 김양서(金養舒)가 횡령한 공전(公錢)을 충당하기 위해 울산 부민들로부터 부당하게 5,000냥을 거두어, 이에 부민들이 반발하여 일으킨 난이었다.
홍철주는 안핵사(按覈使)로서 울산으로 가 난을 주도한 3인과 김양서를 목 베었다.
또한 난에 참여한 부민과 이를 막지 못한 향리 등을 섬으로 귀양 보내고, 지휘감독 책임을 물어 2명의 전울산부사를 의금부에서 조사하게 하였다.
1876년 이조참의, 1877년 성균관대사성이 되었고, 예방승지를 거쳐 1881년 이조참판, 1883년 한성부판윤, 1884년 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 해에 일어난 갑신정변이 실패한 직후 사대당 내각이 수립될 때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1885년 한성부판윤·형조판서·예조판서, 1886년 형조판서·공조판서·상호도감제조(上號都監提調)에
임명되었다.
1887년 3월 전보국총판이 되어 전선을 설치하는 데 공을 세웠다.
같은 해 6월부터 1891년 3월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형조판서를, 세 차례에 걸쳐 예조판서를 맡았다.
권수제, 표지서명, 판심제는 ‘電報章程’이고, 본문의 판식은 新鉛活字版으로. 字數는 10行 25字이다.
권말에 ‘局名洋文捷法’, ‘國文字母號碼打法’, ‘洋文字母號碼打法’ 등 電信에 관한 방법이 표로 정리되어 있다.
본문의 종이는 일반적인 楮紙를 사용하였고, 1冊 11張이다.
당시 조선의 전보관리는 청국 電報摠局 산하 華電局에서 사용하던 지침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1887년에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南路電信線이 개설된 이후 조선 정부는 독자적으로 이를 운영하기 위해 朝鮮電報摠局을 설립하고, 운영 지침으로 『電報章程』을 반포했다.
『電報章程』은 『電報新編』과 『萬國電報章程』을 典範으로 삼아 만들어졌으며, 내용은 32항의 조문 및 요금, 언어, 이용자 및 수발담당자의 권리 및 의무 등 전신 운영을 위한 기본적인
사항들로 구성되었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역사상 최초로 국문전보를 취급할 수 있도록 국문전신부호, 즉 ‘國文字母號碼打法’을 제정한 것이다.
이는 현재 한글 코드의 기원이자 한글이 처음 기계화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한국 지명의 영문식 표기와 그 부호를 제정한 ‘局名洋文捷法’, 국제규례를 적용한 ‘洋文字母號碼打法’, ‘洋文數目號碼打法’, 『奇報章程』에 실린 電編을 준용한 한문전신부호를
수록하고 있다.
전보는 官報·局報·私報로 나누어 국문·한문·영문으로 전보를 주고 받았고, 긴급·照校·수신·追尾 등의 특수전보도 취급하였다.
관보는 免費에다 절대 우선으로 취급하였고, 암호전보와 전보검열제도가 있었다.
역사상 최초로 한글을 부호화한 ‘國文字母號碼打法’이 실려 있는 사료이다
'사진갤러리 > 풍산홍씨선조님 저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16世 (0) | 2018.07.20 |
---|---|
각전궁동가의절(各殿宮動駕儀節)-16世 (0) | 2018.07.20 |
홍진신방(紅疹新方)-16世 (0) | 2018.07.18 |
해거재첩서(海居齋帖書)-19世祖 홍현주 (0) | 2018.07.18 |
삼국사(三國史)-13世祖홍만종 (0) | 2018.07.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