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학자 홍석모(洪錫謨, 1781년~1850년)의 저서로 필사본으로 전해지던 것을 1911년 崔南善이 朝鮮光文會판으로 金邁淳의 <열양세시기> 柳得恭의 <京都雜誌>와 합본하여 발행. 중국 종늠의 <荊楚歲時記>를 모방하여 쓴 책으로 조선의 연중행사. 세시풍속에 관한 것을 그 유래부터 자세히 설명한 책.
본관은 풍산(豊山). 호는 구화재(九華齋), 근와(近窩), 도애(陶厓), 망서당(望西堂), 사옹(蒒翁), 옥탄거사(玉灘居士), 일양헌(一兩軒), 자각산인(紫閣山人), 찬승자(餐勝子). 자는 경부(敬敷),
조부는 이조판서 양호(良浩), 부는 이조판서 희준(羲俊)이며, 모는 선산부사(善山府使) 이장호(李章祜)의 딸이다.
일찍이 별세한 조부 정한(珽漢)에게 아버지가 입양되었으나, 생조부 양호(良浩)의 슬하에서 성장하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04년 갑자식년사마시(甲子式年司馬試)에 생원(生員) 2등으로 합격하였다.
1815년 35세에 음사로 벼슬길에 나아가 대학장의(大學掌議)가 되었다.
1818년 38세에 추조(秋曹)에서 근무하였고, 1819년 39세에 과천현감으로 부임하였으며, 1820년 40세에 황간현감 동지정사(冬至正使)로 떠나는 아버지 홍희준을 배행하고 연행을 하였다.
1832년 52세에 세자익찬(世子翊贊)이 되었고. 1833년 4월 17일 태창령(太倉令)에 임명되었고, 그해 7월 9일 남원부사(南原府使)로 임명되었다.
59세 되던 1839년 4월 3일 강릉령(康陵令)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에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에 임명되었다.
말년에는 국사(菊社)라는 시사를 주도하였다.
말년에 자신의 시문집을 정리 편찬하고 풍속에 관해 저술하기도 하였고, 9세부터 70세에 이르기까지 연월(年月)의 순서에 따라 총 21책으로 정리된 시집을 남겼다.
청나라에 여러 해 사신을 다녔던 사실, 「풍악록(楓岳錄)」과 기행시, 「연날리기(紙鳶)」·「널뛰기(跳板)」·「윷놀이(擲柶)」·「봉화(烽火)」·「담배(南草)」·「안경(眼鏡)」
·「자명종(自鳴鐘)」 등의 풍물시 등이 주목된다.
한편 「석계유거잡영(石溪幽居雜詠)」 34수·「농가잡시(農家雜詩)」 24수 등이 있어 그의 전원적 취향과 풍물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구성은 월초부터 섣달까지 모두 23항목으로 하고, 날짜가 분명치 않은 것은 그 달 끝에 몰아 실었으며, 맨 나중에 윤달 행사를 실었다.
일반적인것 이외에 각 지방의 특수한 풍습도 빠짐없이 실었으며, 너무 광범위하게 다루고자 한 까닭에 없어진 풍속도 수록하였으며 모화사상에 젖어 조선 민족의 풍속과 행사의 기원을 모두
중국의 세시풍속에서 찾고 있는가 하면 <경도잡지> 권2의 세시편을 그대로 조술하여 전재했다.
그러나 민속을 해설한 유서중 가장 자세하고, 중국과의 관계도 밝혔으므로 후세에 도움이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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