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갤러리/풍산홍씨선조님 저서

학강산필(鶴岡散筆)-19世祖 홍석주

홍만식(뜸부기) 2018. 8. 21. 19:38

조선 말기에 홍석주(周, 1774~1842) )가 지은 만필(). 6권 5책. 필사본. 본관은 풍산(). 자는 성백(), 호는 연천().


조부는 영의정 홍낙성()이며, 부는 우부승지 홍인모()이고, 약관에 모시()·경례()·자사()·육예백가()의 글을 모두 읽어

 일가를 이루었고, 한번 읽은 글은 평생 기억할 정도로 총명해 동료들이 감탄하였다.


1795년 전강(殿)에서 수석을 해 직부전시(殿)의 특전을 받고, 그 해 춘당대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사옹원직장을 제수받았고, 1797년 승정원주서가 되고,

1802년 정언이 되었으며, 1807년에는 이조참의가 되었고, 이듬해 가선대부에 올라 병조참판이 되고, 1815년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1832년 양관대제학()을 거쳐, 1834년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이어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손부를 제배받고 1842년에 졸하였다.


淵泉 洪奭周는 19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학자로,  만년에 정계에서 은퇴한 뒤에 노년을 보내면서 지난 날의 견문()이나 독서에서 얻은

견해들을 잡록형식으로 적은 글로서, 《鶴岡散筆》은 일관된 체계를 세워 어떤 내용을 전달한 책은 아니지만,

 그의 사상이 무르익은 만년의 저작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그는 전통적인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老論 계열의 학자이자 당대 제일의 문인으로, 당대의 일반적인 학자의 경향을 대표하는 동시에 최고의 학문적

수준을 보여준 인물이다.


그는 자유로운 서술체계로 經學, 史學, 文學 등 다방면에 걸친 다양한 학문적 편력과 관심을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다.

총 6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권에 85則, 2권에 87則, 3권에 100則, 4권에 109則, 5권에 101則, 6권에 28則의 기사가 실려 있다.

≪학강산필≫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분야는 경학()과 같은 유학사상인이다.


송대의 유학을 존숭하여 청대의 고증학을 비판하고 있다.

청나라의 학자들이 고증학을 실학()이라 부르고 있는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도리어 주경()과 구방()하는 공부인 송유()들의 학문태도를 실용()으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견해는 같은 시대에 활동하였던 정약용()의 경학태도와는 큰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모기령()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학강산필≫의 많은 부분은 역사에 대한 비판과 평가이다.


이것은 중국의 경우와 우리 나라의 경우를 모두 언급하고 있고,나머지는 문학에 대한 견해이다.

대개 조선 말기에 자주 거론되었던 ‘천기론()’에 대한 생각이다.

 

홍석주는 분명하고 논리적으로 천기론을 주장하였다.

홍석주는 시는 성정()에 근본하지만 천기로 발현한다.


 그래야 그 의경()은 진지하고, 그 사()는 유원()하며, 그 기()는 유동()하게 된다.

그 용()은 감인()이 주가 되어야 하고, 그 공()은 흥권징창()에 돌려야 한다.


그 효()는 이풍역속()에 이르러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종래의 효용론적 문학관을 답습하고는 있다.


그러나 시의 표출과정과 작용을 명료하게 집약해 놓았다.

조직과 꾸밈을 반대하고 진솔한 감정이 자연스럽게 유로()된 작품이야말로 진실성을 획득하게 되어, 남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천기를 주장하는 홍석주는 시의 형태에 있어서도 근체시보다는 고시()를 좋게 생각하였다.

특히, 사영운()이 부화()한 표현을 쓰기 시작하여 뒷날의 시도()에 손상을 주었다고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학강산필≫은 1984년오성사()에서 영인하고 발행한 ≪연천전서 ≫ 제7책에 수록되어 있다.

2004년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으로 인제대학교 김광조 교수가 완역하여 학술정보로 등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