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갤러리/풍산홍씨선조님 저서

운석문선(耘石文選)-18世祖 홍경모

홍만식(뜸부기) 2018. 8. 23. 18:5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홍경모(謨, 1774년∼1851년) )의 문집선().불분권 15책. 필사본. 규장각 도서.

본관은 풍산(). 자는 경수(), 호는 관암() 또는 운석일민(). 시호는 문정().

조부는 이조판서를 지낸 홍양호()이고, 부는 홍낙원()이며, 모는 전주이씨()로 사간원정언 이존원()의 딸이다.

정조 때 동몽으로 뽑혀 편전에 입시하여 『효경』을 강()하였고, 오언시를 지어 정조로부터 서책과 패향()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1805년 성균관유생이 되었고, 181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 해에 시독관()으로서 홍문관에 장서가 없음을 개탄하고 계청()하여 『예기』·『주역』·『퇴계집(退)』 등을 간행하게 하였다.

그 후 대사성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으나 관리등용의 실책으로 한 때 법성첨절사(使)로 좌천되기도 하였다가 곧 중용되어 1830년 사은부사(使)로,

1834년 진하사(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헌종 때 대사헌을 거쳐 이조·예조·호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였고,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독서를 즐겨 장서가 많았으며,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뛰어났다.

제1책 머리에 청나라 기수유()의 서문이 있고 발문은 없고, 서문이 있는 책이 제1책일 것으로 추정될 뿐 권수·책수가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편집자와 필사한 사람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저자의 저서로는 『운석문선()』 외에도 전편 18권, 후편 4권으로 모두 22권 11책의 필사 고본()인 『운석외사()』가 있다. 『운석외사』에 실린 자서()에는 “본편·후편 외에도 60대 이후의 저작()을 모은 속편이 또 있다.”고 했으나, 『운석외사』에는 속편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두 책의 내용에는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개 서로 비슷하며, 가끔 『운석외사』에 없는 것이 『운석문선』에 있다. 이는 아마 저자나 편집자가 전편·후편·속편 3편에서 선집()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저자가 자서에서 유년기부터 출사() 이전의 것을 전편에, 출사 이후부터 60세까지의 것을 후편에, 그 뒤의 저작을 속편으로 편집했다고 편집 내용을 밝힌 것으로 보아, 저자 자신이 전집() 중에서 정선하여 엮었을 가능성도 높다.

이 책에는 풍아()·사()·부()·서() 1책, 서독() 2책, 기() 4책, 발미() 2책, 서()·인() 1책, 제후() 1책, 찬·명·상량문·전() 1책, 고문()·제문 1책, 애사·뇌()·비문 1책, 묘표·묘지명·행장 1책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서독은 주로 청나라 문인들과 주고받은 편지다. 기 가운데 「풍패성적기()」는 조선 왕조의 발상지를 배경으로 함경도 일원에 산재한 각 능원()·전각(殿)·유적지 등의 위치·연혁 등을 상세히 기술하였다. 「해악기행기()」·「해악산수기()」는 금강산을 중심으로 그 지역 지리를 자세히 밝히고, 산수·풍경·사찰을 비롯한 각 명승고적의 위치·유래·전설·풍경·연혁 등을 자세히 밝혀 놓았다.

「인서기()」는 당시 70세 이상의 조관()과 서민 중 80세 이상의 고령자 7만 5145명을 조사해 나라에 보고한 것이다. 당시의 인구 실태 연구에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태백쇄사기()」는 태백산 사고()에 소장된 실록에 관한 기록으로, 실록 저장에 관한 실태를 알 수 있다.

「열성조어필첩()」은 문종의 당시서첩()부터 순조까지의 역대 임금의 어필과 왕비가 남긴 서첩을 하나하나 고증을 곁들여 서평()을 하였다. 

제후에는 각 시대의 각종 서첩·인본과 중국 석고문()의 구본과 신본을 비롯해 각 금석문·법첩()·유묵 등을 전후 수십 편에 걸쳐 상태와 가치를 논하고, 진가()를 변정()했으며, 유래와 소장된 곳을 밝혀 고증했으므로 서첩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