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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일사(丙寅日史)-19世祖홍한주

홍만식(뜸부기) 2018. 9. 1. 09:33

『병인일사(丙寅日史)』 필사본 1책은 홍한주(洪翰周, 1798-1868)가 쓴 병인년(1866)의 일기로, 홍한주는 일기를 1년 단위로 1책씩 묶어서 제목을 붙이고 책으로 만들었고, 그 가운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미국버클리대학 동아시아도서관에 3책이 소장되어 있다.

일반적인 일기의 서술 방식이다. 병인년에 홍한주 개인은 그야말로 ‘맑았다.’ 그는 특별히 그럴만한 일이 있었다. ‘비로소 서울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전라도 지도(智島)에서의 유배에서 풀려나서 돌아온 것을 이른다. 해배되고 처음에는 『신유일사』에 보인 대로, 공주 부근의 향저(鄕邸)에서 기거하다가 이 때 비로소 서울의 본디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게다가 3월말에는 아들 우창(祐昌)이 문과를 하고, 4월초에는 저자 자신이 서용되었다.

그러나 국가적으로는 병인양요라는 말이 귀에 익었거니와, 극히 어려운 한 해였다. 국내적으로는 수렴청정이 끝나고 열여섯 살의 동갑내기 왕비를 맞은 고종이 친정을 하지만 홍한주는 대원군의 존재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새해 벽두부터 터진 남종삼(南種三)의 사건에서 비롯된 이른바 병인박해와 그에 이은 외환, 그리고 셔어먼호 사건 같은 대외적으로 중요한 일들이 줄을 이었다. 『병인일사』에서 양적으로 가장 풍부한 것이 양이(洋夷)에 대한 기술이다.
『병인일사』의 내용은 크게 개인과 가정의 일상, 인물과 교유, 시사(時事)와 정국의 정세, 그리고 독서의 네 가지가 된다.

병인년은 1월 9일의 서양 선교사 체포로 시작되었다. 조선에 온지 11년이나 되었고, 홍한주에게는 한 집안 사람인 홍봉주(洪鳳周)의 집에 묵고 있었다. 홍봉주의 조부 낙민(樂敏)은 신유사옥(1801)에 죽었고, 부친 재영(梓榮) 역시 천주교도로 전주 감옥에서 죽어서, 3대가 모두 죽임을 당한 집안이라고 한다. 1월 16일 남종삼(南鍾三)이 체포되어 1월 21일 홍봉주와 함께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고, 전후로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이 처형되었다. 이때 같이 처형당한 사람 가운데 최형(崔炯)이라는 이는 한글로 서양서, 즉 성경을 번역하여 홍봉주의 집에 쌓아두었는데, 수진판(袖珍板) 크기의 책이 16석 분량이나 되었다고 한다. 모두 압수해서 의금부 뜰에서 불태웠다고 한다.

이른바 병인사옥으로 7월 초에 중국 정부가 경위를 묻는 외교문서를 보내오고 조선 정부는 온 조정이 그 답신에 신경을 바짝 쓰는 상황이 전개된다. 회답 문서를 판서 김경도(金景道)가 작성했지만 대원군이 직접 다시 손을 댔다는 전문을 기록하고 있다.

홍한주는 이 사태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하였던가? 그는 “근자에 연해에 출몰하는 서양 선박으로 인해 서울의 민심이 흉흉해서 안정시킬 수가 없다”고 하고, “양이(洋夷)는 오로지 전쟁을 능사로 삼고 배를 국토로 삼아서 만국이 침략을 당하지 않는 나라가 없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유독 조선만이 침략의 치욕을 면해온 것은 “조선을 중하게 여기고 꺼려서가 아니라 그들은 벌써 우리나라의 형편[淺深]을 다 알고, 우리는 가난하고 힘이 없어서 실로 욕심을 낼만한 재화와 이익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그렇다면 부강해서 침략을 당하는 것보다 도리어 낫다”고 말한다. 실로 모멸인데,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있었다.
고종의 왕비를 간택하는 일과 경복궁 중건도 이 해 국내의 큰일이었다. 홍한주는 경복궁 공사 현장을 방문하고 “기한이 없겠다.”는 소감을 기록하고 있다(2월 26일). 또, 공사 현장의 화재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도 남기고 있다.
밤에 경복궁 내 재목을 쌓아두는 임시 가옥에서 화재가 나서 수백 칸을 태웠다고 한다. 작년 4월 공사를 시작하고 지금까지 실화가 네 차례다. (3월 5일)
개인적으로 홍한주는 이해 4월에 공주 장전리에 있던 집을 팔고 서울로 완전히 이사를 했다. 4월 8일, 매매대금인 전(錢) 10만 문(文)을 공주 사람 유기훈(柳冀薰)이라는 이가 받아왔다고 한다.
이밖에 저자의 정치적 입장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김종수(金鍾秀)나 홍치중(洪致中)에 대한 기록 등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나, 남종삼의 아내는 그 4살 아들과 7세, 9세된 딸과 함께 창녕현에 노비로 보내졌다는 기록, 7월 하순에 발생한, 박규수가 관계된 셔어먼 호 사건, 연말인 12월 중순에 육로 통상을 요구해온 러시아 문제 등에 대한 기록들이 있다.
병인사옥과 그에 이은 병인양요가 있었던 해의 일기이므로, 그 사건들에 대한 일차 자료로서 활용될 것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