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갤러리/풍산홍씨선조님 저서

계해일사(癸亥日史)-19世祖홍한주

홍만식(뜸부기) 2018. 9. 1. 09:34
『계해일사(癸亥日史)』 필사본 1책은 홍한주(洪翰周, 1798-1868)가 쓴 계해년(1863. 철종14)의 일기로. 홍한주는 일기를 1년 단위로 1책씩 묶어서 제목을 붙이고 책으로 묶었고, 그 가운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미국버클리대학 동아시아도서관에 3책이 소장되어 있다.
1월 23일 일기 가운데 두 줄 삭제된 곳이 있고, 10월과 11월에는 날짜만 기록되고 기사가 없는 날이 여러 날 보이지만, 빠진 날짜는 없다. 전체가 한 사람의 필체로 필사된 듯하다.
다음은 『계해일사』의 첫 줄이다.
계해년. 성상(聖上) 즉위 14년 〇 청(淸)동치(同治) 2년 〇 내 나이 66세. 죄로 유배되어 전라도나주목의 지도에 있으면서 섬 주민 양국신(梁國臣)의 집에 붙어산 지 벌써 123일째다.
“123일째.” 유배되고 하루하루 날을 세면서 지내고 있는 마음이 잘 드러난다. 곧, 이 일기는 저자가 섬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쓰였다는 것이 가장 주요한 특색이다.
둘째 줄이다.
정월 초하루 무신일. 맑음. 홀로 앉아 봄을 맞으니 집과 서울이 까마득하다. 저물녁 노을이 하늘을 수놓으니 나그네 회포가 그지없다.
설날, 참으로 처량한 광경이다. 그래서 저자는 밤에 그 회포를 담아 칠언율시 한 수를 남기고 있다. 하지만 앞서의 기술에 이어서, “화순 사는 집안사람 남판동(南判東) 및 감문(甘文) 장교박경한(朴慶漢), 공산(公山) 장교오영완(吳永完), 광산(光山) 사람 최갑륜(崔甲崙), 서울 사람 정학성(鄭學成)이 모두 뵈러 왔다.”고 한다. 원근의 사람이 다섯씩이나 멀리 섬에 유배 가 있는 홍한주에게 설날 세배를 왔다는 것이다. 전후로 설명이 없어서 사정을 알 수 없으나, 설날에 맞추어서 지도에 도착하자면 적어도 며칠 이전에 출발을 했을 터이다. 한두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여러 사람들이 설날에 세배를 온 것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지만, 요는 유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홍한주는 일정 정도의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1월 3일은 지도의 행정 책임자인 진장(鎭將)이 밤에 뵈러 왔는데, 그는 홍한주를 자주 찾는다. 나주목사 역시 자주 편지와 물건을 보내온다(2월 2일 일기 등). 1월 5일에는 평안도정주목사로 옮겨가는 광주(光州) 목사 서 아무가 출발에 앞서 작별의 편지를 보내온다. 곧, 인근 고을의 여러 수령들이 홍한주를 경제적으로 도와준다. 저자에게는 그런 기반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배는 역시 형벌이므로, 괴로움이 없을 수가 없다. 1월 26일에는 피가 섞인 가래가 나와서, 이후 70여일을 매일 아이 오줌을 받아 마신다.
5월 28일 계유
돌아가신 어머니의 생신이시다. 먼 곳에 있으면서 사모하는 마음 느껍다. 〇 『일지록』 및 『간명서목(簡明書目)』을 읽다. 〇 『염필』 한 개 조목을 초하였다. 〇 밤에 아이 오줌을 마셨다. 예순 아홉 번째.
『지수염필』을 쓰고 독서하는 것이 유배 생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집필과 독서는 유배지에서 건강이 좋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저자는 몸집이 작은 편에다 체증이 잘 생기고 소화 기능도 좋지 않은 체질이었다. 유배 이전에도 체하고 설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후로 혈담(血痰) 증세까지 더해진 것이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유배지에서 홍한주는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유배 초기에 조카 홍우길(洪祐吉)에게 보낸 편지의 한 부분에서, “거처를 정한 곳은 진(鎭)의 아전인 양씨(梁氏)의 집인데, 아래 위 칸 온돌방에 툇마루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데리고 온 늙은 여종은 그 집 안채에서 지내도록 맡겼지만, 그러나 손을 쓰려고 해본들 쓸 수 없는 터에 익숙한 솜씨를 어디에 쓰겠느냐.”고 말하고 있다. 음식을 담당할 여종을 따로 데리고 간 것이다. 같은 편지의 앞부분에서, 섬사람들은 조와 보리만 먹을 뿐 쌀은 옥보다 귀하고, 고기며 소채며 장과 소금 등은 모두 바다 건너 60리 떨어진 곳, 사흘은 걸려야 되는 시장에서 사와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요리를 할 종을 데리고 갔지만 찬거리 조달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외출했다가 가마를 타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가마꾼 역시 준비가 되어 있었던 듯하다. 그의 거처에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가까이는 그 고을 수령에서 멀리는 충청감사나 서울에 있는 지인들까지 끊임없이 서신을 왕래하고 있다. 조정의 동향에도 아주 밝다.
서신을 주고받는 친분이 있는 그 지방 관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지도에 거주하던 황연근(黃淵根)이라는 인물이 홍한주의 심부름꾼으로 연락을 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거니와, 집 주인인 양국신(梁國臣) 자신이 직접 편지를 갖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극진하게 대접한 덕분인지, 해배(解配) 후에 서울에 거주하던 홍한주의 집에도 그 아들과 함께 여러 차례 들른 기록이 보인다. 양국신의 집에 고용되어 일을 하던 사람도 여럿이었는데, 홍한주는 그들을 심부름꾼으로 부리고 있다.
홍한주는 또 유배지에서 제자를 두기도 했다.
1월 12일(기미) 맑음. 『염필』 두 조목을 썼다. …(중략)… ○ 이웃 백성 중에 안치영(安致榮)이라는 자가 있는데 나이 열아홉이고 김응연(金應淵)이라는 자는 나이 열 넷인데, 함께 와서 『강사(江史)』(통감절요)를 배운다.
이 두 사람은 홍한주가 해배되어 지도(智島)를 떠나던 8월 17일, 함께 한동안 길을 따라가면서 스승을 배웅하기도 했다. 2인 이외에도 그 문하에서 배운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여건에서 홍한주는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일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그 결과물이 『지수염필』이다. 1월치 일기에서 ‘염필’ 몇 조목을 썼다는 기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월 2일 2則, 3일 1則, 4일 2則, 5일 2則, 6일 3則, 7일 3則, 8일 2則, 9일 1則, 10일 1則, 11일 4則, 12일 2則, 13일 5則, 14일 3則, 16일 2則, 19일 1則, 20일 4則, 21일 2則, 22일 2則, 23일 3則, 24일 1則, 25일 5則, 27일 1則, 28일 2則, 29일 1則. (이상 55則)
2월 1일 기사에 “『염필』 3조목을 썼다. 또 제3책을 시작했다.”고 한 기술로 보아, 1월말에 제2책까지 완성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2월 29일조에는 “제3책을 마치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3월 1일자에는 1則을 草했다는 말에 이어, “제4책을 시작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4월 18일자에는 “4권을 마치다”라고 하였고, 4월 21일자에 “제5권을 쓰기 시작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6월 17일자에는 “홍중겸(洪仲謙)이 작은 공책을 가지고 와서 『염필』을 등사하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갔다”고 하고, 이어 19일자에는 “홍중겸이 또 와서 등사하다가 날이 저물어서 『염필』 제1권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 22일자에 “홍중겸이 『염필』 제1책을 가지고 와서 또 제2책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
8월 11일 일기에 7월 29일자 석방 명령을 싣고 있고, 그 다음날 공주 부근 장전(長田)의 집에서 종(同奴라고 표기. 뒤에도 자주 보임)이 가마꾼 4인과 말 두 필을 끌고 지도에 도착한다. 정돈을 해서 8월 17일, 배소를 출발한다. 24일 자정 무렵에 집에 도착한다.
9월 2일자에, “성우(成右)가 와서 머물러서, 그와 더불어 『지수염필』을 교정하고, 또 정서를 시작했다”고 하고 있어서, 이때에는 저술은 마무리가 된 것으로 보인다. 9월 6일자에는 “성우가 또 와서 『염필』을 등사했다”고 하고 있다. 10월 그믐날에는 “성우가 등사한 『염필』 제4책 필사가 끝나고 교수(校讎)를 마쳐서 장정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지수염필』은 13개월간의 유배 기간이 끝날 때 집필이 완료되었고, 약 2개월 뒤에는 책으로 완전하게 장정이 되었다. 현재 『지수염필』은 251개 조목이다. 1월부터 7월 사이에 200여개 조목이 쓰였고, 나머지 50개 가량의 조목은 유배 초기인 그 전해, 1862년에 쓰였다.
『지수염필』과 관련해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기록은 홍한주의 나이 69세인 1866년의 일기 『병인일사(丙寅日史)』의 1월 24일 기사다.
원천(原泉)이 또 『지수염필』의 서문 및 나의 「제석(除夕)」과 「원일(元日)」 두 율시에 화운한 시를 갖고 와서 보여주었다.
홍우건(洪祐健)이 『지수염필』의 서문을 썼다는 것이다. 현재 전하는 『지수염필』의 두 이본에는 모두 서문이 없는데, 완성되고 3년 뒤에 홍우건이 서문을 썼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원천집』(경인문화사 영인, 1999)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같은 일기의 7월 27일조에 있는 기사 역시 기록해둘만 하다.
『지수염필』을 네 권의 책으로 장정을 해서 석우(石友) 이용여(李用汝)에게 보내 표지 제목의 글씨를 써달라고 했다. 용여(用汝)는 고동(古東) 이공 익회(李公翊會)의 장남인데, 서품(書品)이 그 어른만은 못하지만 스스로 이름할 만하다.
『지수염필』에 쏟은 홍한주의 정성은 지극한 바, 이때 최종적인 모양이 만들어진 듯하다. 이석우(李石友)는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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