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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대방(牧民大方)-16世祖 홍양호

홍만식(뜸부기) 2018. 8. 21. 20:30

조선 후기 학자 문신 홍양호(洪良浩, 1724년~1802년)가 편찬한 민정서(民政書). 1책 29장. 목활자본. 규장각 도서.

본관은 풍산(). 초명은 양한(). 자는 한사(), 호는 이계(). 시호는 문헌.


홍만회()의 증손으로, 조부는 군수 홍중성()이고, 부는 홍진보()이며, 모는 심수현()의 딸이다. 이조판서 홍경모()의 조부이다.

1747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752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사헌부 지평, 홍문관 수찬·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774년 등준시()에 뽑히기도 하였고. 1777년 홍국영()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경흥부사로 밀려났다가 홍국영이 실각되면서 1781년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이어 사간원대사간·사헌부대사헌·평안도관찰사·이조판서 등을 거쳐 1799년에는 홍문관·예문관 양관()의 대제학을 겸임하는 최고의 영예를 지냈다.


두 차례에 걸쳐 연경()을 다녀오면서 중국의 석학들과 교유해 문명()을 날렸으며, 고증학()을 수용·보급하는 데 기여하였다.

『영조실록』·『국조보감』·『갱장록()』·『동문휘고()』를 비롯한 각종 편찬사업을 주관하기도 했으며, 지방관의 지침서인

 『목민대방()』을 저술하였다.


특히, 1764년에는 일본에 가는 통신사(使) 일행에게 부탁해 벚나무 묘목을 들여다가 서울 우이동에 심어 뒷날의 경승지를 이루게도 하였다.

1801년 판중추부사로 물러났다가 이듬 해 79세의 나이로 죽었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고  바르면서 숙련되고 법칙이 있어서 당시 조정의 신료 중에 따를 사람이 없다는 평을 받았다.

글씨도 진체()와 당체()에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다.


곡산의 신덕왕후사제구기비()와 수원성()의 북문루상량문()이 대표적이다. 

저자 홍양호가 1778년 경흥부사(慶興府使)로 부임한 후 현직 수령으로 있으면서 지방 행정에 관한 자신의 소견을 체계화한 내용을 엮은 것이다.

본래 그의 문집 『이계외집 耳溪外集』에 수록되었으나, 뒤에 별도로 발췌해 ‘목민대방’이라는 제목을 붙여 간행한 것이다.


체재는 서론격인 편제(篇題)와 본론, 그리고 후제(後題)로 되어 있다.

먼저 편제에서는 목민(牧民)의 도가 삼경(三經)과 육전(六典)에 있음을 밝혔다.


삼경은 정(政)의 본(本)이 되는 치(治)·양(養)·교(敎)를, 육전은 정(政)의 구(具)로서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을 뜻하는 것이다.

육전은 다시 이·병·형을 치구(治具)로, 호·공은 양구(養具)로, 예를 교구(敎具)로 삼아, 이 구들을 합당하게 적용하면 나라가 고루 평안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본론은 이전·호전·예전·병전에 관한 각 10조와 형전에 관한 7조, 공전에 관한 7조, 그리고 십오상련지제(什五相聯之制)로 되어 있다. 육전 체제로 기술하는 것은 그 뒤 조선시대 민정서의 규범적인 체제의 효시가 되었다.


본론의 마지막에 있는 십오상련지제는 당시 향촌 사회의 지배 체제에 대한 개혁안으로, 통수(統首)·패장(牌長)·이감(里監)·이정(里正)·기찰장(譏察將)·

풍헌(風憲) 등의 임무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책의 끝에 첨부된 후제는 좌우명(座右銘)으로 되어 있다.

『이계외집』에 수록되어 있고, 1942년에 편찬한 『조선민정자료(朝鮮民政資料)』 목민편(牧民篇)에도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당시의 실정에 바탕을 두고 개혁안을 서술한 점에서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비견할만한 가치를 지닌다.

2012년 2월 혜안에서 『목민고. 목민대방』김용흠 역주로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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