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홍봉한(洪鳳漢,1713년-1778년)이 1733년부터 1744년까지의 관직생활을 하며 겪었던 주요 사건을 기록한 책. 2책. 필사본. 규장각. 장서각.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소장.
본관은 풍산(豊山), 자(字)는 익여(翼汝), 호(號)는 익익재(翼翼齋), 시호(諡號)는 익정(翼靖).
선조(宣祖)의 딸 정명공주(貞明公主)의 부마(駙馬)였던 영안위(永安尉) 주원(柱元, 1606년-1672년)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이조판서 홍만용(洪萬容)이며, 조부는 홍중기(洪重箕)이고,
부는 홍현보(洪鉉輔)이며, 모는 임방(任埅)의 딸이고,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장인이다.
1735년 생원이 되고, 음보(蔭補)로 참봉에 등용되어 세자익위사세마로 있을 때인 1743년 딸이 세자빈(惠慶宮洪氏)으로 뽑혔다.
이듬해 세마로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사관(史官)이 되었고. 다음 해 어영대장에 오르고, 이어 예조참판으로 연접도감제조(延接都監提調)를 지낸 뒤 1752년 동지경연사가 되었다.
그리고 비변사당상이 되어 청인(淸人)들이 애양책문(靉陽柵門) 밖에서 거주하며 개간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임진절목(臨津節目)』을 편찬하였다.
1755년 구관당상(句管堂上)·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이어 좌참찬에 승진하였으며, 1759년 세손사(世孫師)가 되었다.
1761년 세자의 평양원유사건(平壤遠遊事件)으로 인책당한 이천보(李天輔)·민백상(閔百祥) 등이 자살하자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그 해에 좌의정을 거쳐 판돈녕부사를 지낸 뒤 영의정에 올랐다.
한때 세자 문제로 파직되기도 했으나 곧 좌의정으로 복직되었다.
1763년에는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오는 등 영조의 정책에 순응해 많은 업적을 이룩하였다.
특히, 당쟁의 폐해를 시정하고 인재를 발탁할 것 등의 시무6조(時務六條)를 건의해 시행하게 하였다. 또한 백골징포와 환곡작폐의 엄금, 은결(隱結)의 재조사 등을 단행하게 해 국고를
채우고 백성의 부담을 경감하도록 하였다.
1768년 다시 영의정에 올랐고, 울릉도의 사적을 널리 조사한 내용을 책으로 엮음으로써 그곳에 대한 영토의식을 높였다.
1771년 영중추부사로 있던 중 반대 세력에 의해 사도세자의 아들 은신군 진(恩信君禛)·은언군 인(恩彦君裀)의 관작이 삭탈되고 나아가 세손까지 그 권위가 위협당하자 이를 막다가 삭직되고
청주에 부처되었으나. 홍국영(洪國榮)의 기민한 수습으로 풀려나온 뒤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사도세자의 장인이며, 세손(정조)의 외할아버지로서 영조계비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金氏)의 친정 인물인 김구주(金龜柱) 세력과 권력 다툼을 하였다.
영조대 중반 이후 당시 세간에서는 경주 김씨 세력을 남당(南黨)으로 부른데 반해, 풍산홍씨가를 북당(北黨)으로 구분하여 지칭하였고. 김구주 중심의 남당(南黨)에 대립했던 북당(北黨)의
중심 인물로 평가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 노론·소론이 대립하는 가운데 1762년 세자가 죽음을 당할 때에 방관적인 태도를 취해 후일 정적들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다.
영조가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는 등 세자에 대한 처분을 뉘우치자, 그 사건을 초래하게 한 김구주 일파를 탄핵해 정권을 장악하였다.
세자 죽음의 전말을 상세히 적은 『수의편(垂義篇)』을 편찬해 반대파를 배격하는 구실로 이용하였고. 정조 연간에는 그의 행적에 대한 시비가 정파 대립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으며, 그를
공격하는가 또는 두둔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벽파(僻派)와 시파(時派)를 구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오화변 동안 그는 세자의 죽음에 개입되었다는 점과 나삼 사건, 동생인 홍인한(洪麟漢)이 세손의 즉위를 방해했다는 등의 이유로 정치적 반대파들에 의해 곤경에 처하였으나 정조
(正祖)와 순조대 혜경궁 홍씨 등의 노력으로 신원되었다.
이 만록은 1733년 9월부터 1748년 10월2일까지 상․하(上․下) 두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권(上卷)은 문과(文科) 합격 이전의 기록부터 시작한다.
1733년 9월 식년시인 진사초시(進士初試)에 3등에 올랐으며, 이듬해 1734년(同王10) 9월에도 진사초시 3등에 올랐으나 회시(會試)는 보지 않았다.
1735년 4월 증광시(增廣試)에 참여하였다.
10월 송준길(宋浚吉), 송시열(宋時烈) 종향(從享) 일로 김광태(金光泰), 이원(李瑗) 등과 함께 진장(陳章)하였다.
1742년 9월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수의(首擬)되었으나 미수(未受)하였다.
1742년 윤(閏)4월 성균관(成均館) 재임(齋任)으로 국왕 친임 대사례(大射禮)에 참여한 바 있으며, 7월21일 의릉참봉(懿陵參奉)에 제수되었고, 11월10일 익위사(翊衛司) 세마(洗馬)에 이배(移拜)되었다.
한편 동년 8월4일부터 왕세자빈(王世子嬪) 간택령이 내려 자신의 딸이 간택되는 과정을 서술하였다.
1744년 8월19일 문과(文科)에 참여하여 입격하고, 11월4일 승정원(承政院) 가주서(假注書)에 제수되었다가 21일 시강원(侍講院)문학(文學)에 임명되자 사퇴소(辭退疏)를 올렸다.
1745년 2월11일 빈궁(嬪宮)이 종환(腫患)을 앓아 별입직(別入直)하고 숙마(熟馬)를 하사받았다.
4월14일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었고, 9월16일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어 입시(入侍)한 기사(記事)를 수록하였다.
10월2일 광주부윤(廣州府尹)에 임명되었으나 12월 사퇴소를 올렸다.
1746년 1월6일 낙창군(洛昌君) 탱(樘)이 상소하여 봉진(封進)의 잘못을 지적하자 이에 동부승지로서 자책소를 올렸고, 이날 입시기사를 수록하였다.
26일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으며, 3월 25일(53) 공홍감사(公洪監事)에 제수되어 이에 사퇴소를 올렸다.
9월17일(57) 영돈녕부정(寧敦寧府正)에 제수되고, 28일(60)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임명받았으나 12월28일 영조의 10번째 딸인 화유옹주(和柔翁主)가 두환(痘患, 天然痘)에 걸리자 체직이 허락되어 세자(世子)와 빈궁(嬪宮)을 모시고 경덕궁(慶德宮)에서 20여일을 별입직하였다.
하권(下卷)은 상권에 이어 그의 별입직이 이어지고, 야직(夜直)까지 겸하자 영조가 건강을 우려하여 야직을 금지하는 전교에서 시작된다.
2월19일 호조참의에 이르고, 25일 우의정 민응수(閔應洙)가 팔도연분계목(八道年分啓目)을 논하면서 충청도에 획급된 곳이 천 여결에 이르렀다는 보고에 3월1일 취리(就理, 관료에 대한 조사)를 받았다.
5월22일 동궁이 다시 감기 증세가 있어 입직했다는 기사, 6월10일 우부승지가 된 일, 16일 좌부승지로 수행한 입시기사 등이 실려 있다.
이때부터 대신(大臣), 유신(儒臣), 금오당상(金吾堂上), 비국당상(備局堂上) 등과 정국 운영에 대한 의견제시 및 현안에 대한 대담내용이 차례대로 정리되어 있다.
1748년 1월5일 좌의정(左議政) 조현명(趙顯命) 등이 그를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천망한 차대(次對)기사가 발췌되었고, 10일 이 직에 제수되었다.
3월 18일(108) 영녕전(永寧殿) 신장(神欌)에 대한 설치, 성균관에 소용되는 제물 요청 상소가 있으며, 4월17일(115) 한성부 관리 등과 함께 윤대(輪對)한 기사와 26일 경기감사(京畿監司)에
제수되어 숙배한 일을 기록하였다.
이해 5월2일 입시에서 경기도 사정을 보고하고, 8월11일 역로(驛路) 사정과 10월2일 명릉(明陵), 창․경릉(昌․敬陵)의 어로(御路) 보전에 대한 일로 보고한 사항 등을 서술하였다.
기사의 일자(日字)는 ‘○’ 권점(圈點)으로 나뉘어져 있으나 통일성은 없다. 만록 내 등장하는 개인 기록을 제외한 각종 상소․하교(下敎)․비답(批答) 등은 ‘조보(朝報)’ 등에서 발췌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술상 특징은 본문 내용에 대해 상세 부기(附記)가 필요한 곳, 가령 시관(試官) 명단, 전형(典型)시 전관(銓官) 명단이나 인명은 쌍행(雙行)으로 처리하였다.
홍봉한 본인의 발언은 ‘홍왈(洪曰)’의 형식으로 서술하였다. 장서각본과 규장각본은 건(乾), 곤(坤)으로 구분되어 있고, 장서각본은 원소장처였던 ‘이왕가도서지장(李王家圖書之章)’으로
인기(印記)되어 있으며 규장각본은 책 말미에 ‘소화(昭和) 5년’(1930년) ‘이왕직(李王職) 소장(所藏) 사본(寫本)을 등사(謄寫)’했다라고 적혀 있어 장서각본이 규장각본의 원본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홍봉한이 출사했던 초기 기록물로 사관(士官)생활의 일단락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딸이 왕세자의 빈(嬪)에 간택되면서 문과급제와 함께 빠른 승진을 거듭하였다.
이 과정은 국왕인 영조에게 실무 능력이 인정받아 훗날 영의정까지 오르는 계기로 이해된다.
이 책에 문과 급제 전 과거 응시 사례와 성균관 장의(掌議)로서 관학유생상소에 동참하였던 일을 비롯, 문과 급제 후 승정원 승지(承旨)와 지방행정관을 맡으며 경세가(經世家)로서의 실력을
발휘한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그가 입시했을 때에 국왕 영조와 논의했던 내용과 각종 상소 등은 ‘조보(朝報)’ 등을 통해 발췌된 것으로 보이며, 전체 원문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도 확인된다.
홍봉한의 후기 기록은 정조년간 아들 홍낙임(洪樂任) 등이 편차하고 정조가 직접 서(敍), 인(引)을 붙인『어제홍익정공주고(御定洪翼靖公奏藁)』가 있어 이 책의 초기내용과 더불어 그의 모든 관력을 살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영조대 후반 풍산홍씨가는 경주 김씨(慶州金氏) 집안과 더불어 국왕의 인척세력으로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지만 아직 정치사연구에서 이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명확히 정리되어 있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