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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보전(尙書補傳)19世祖 홍석주

홍만식(뜸부기) 2018. 8. 23. 18:37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홍석주(, 1774년∼1842년)가 1813년 蔡沈의 『尙書集傳』의 잘못을 바로잡고 보충하기 위해 저술한 책. 3권 1책. 활자본. 장서각 소장

본관은 풍산. 초명은 호기. 자는 성백, 호는 연천.

조부는 영의정 홍낙성()이며, 부는 우부승지 홍인모()이고, 약관에 모시()·경례()·자사()·육예백가()의 글을 모두 읽어 일가를 이루었고, 한번 읽은 글은 평생 기억할 정도로 총명해 동료들이 감탄하였다. 

1795년 전강에서 수석을 하여 직부전시의 특전을 받았고, 그해 문과에 급제하여 직장·검열 등을 역임하고 1802년 정언이 되었다.

이듬해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후 성천부사·이조참의·병조참판·충청도관찰사·전라도관찰사·양관대제학·이조판서를 역임했다.

1834년에는 좌의정으로 세손의 사부가 되어 헌종과 인연을 맺었고, 안동김씨 세력의 주변적 신료로서 세도정국에 참여했고 순조가 죽은 후 풍양조씨와 세력을 다투어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일익을 담당했다.

1836년 남응중의 모반에 연루되어 김로(金路)의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가 1839년 복직하여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학통상으로 노론 계열인 김창협(金昌協)·김원행(金元行)을 이었으며,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고염무(顧炎武)의 학문에 영향을 받았고, 실학·무실을 주안으로 하는 박학을 강조했으나, 고증학에서 의리를 뒤로 미루는 것은 폐단이라고 비판하면서 주자학의 원칙을 지켜야 함을 주장했다.

주자학설의 인식방법에서도 현상을 통해 본질을 추구한다는 역추·추리의 방법을 취했다.

특히 〈상서 尙書〉 연구에 힘을 기울여 성선설과 인물성이론에 근거를 두고 군주와 소인이 선험적으로 구분된다는 인간론을 강조했고, 이런 논리 위에서 봉건사회의 위기상황도 기존의

세력권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부분적인 제도의 변통 및 능력 본위의 신료 선발로 해결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 신권중심정치론으로 나타났다.


表紙書名은 ‘尙書補傳’이다. 신식 인쇄본으로 표지 서명 아래에 朝鮮光文會가 표기되어 있고, 편제면에는 ‘朝鮮光文會發行 尙書補傳 惺堂金敦熙’라고 적혀 있고, ‘趙東潤’, ‘惠后’, ‘金敦熙’라고

쓰인 인장이 찍혀 날인되어 있다. 卷末에 판권지가 있다.

己酉年(1909)金鶴鎭(1838~1917)이 쓴 이 쓴 序文과 大正二年(1913) 조선광문회에서 발행했다는 刊記가 실려 있다.

목차는 3권으로 이루어졌다. 권1은 「堯典」, 「舜典」, 「大禹謨」, 「皐陶謨」, 「益稷」, 「禹貢」, 「甘誓」, 「五子之歌」, 「胤征」, 「湯誓」, 「仲虺之誥」, 「湯誥」, 「伊訓」, 「太甲」, 「咸有一德」, 「盤庚」, 「說命」, 「高宗肜日」, 「西伯戡黎」, 「微子」, 「泰誓」, 「牧誓」, 「武成」의 23편, 권2는 「洪範」, 「旅獒」, 「金縢」, 「大誥」, 「康誥」, 「酒誥」, 「梓材」, 「召誥」, 「洛誥」의 9편, 권3은 「多士」, 「無逸」, 「君奭」, 「蔡仲之命」, 「多方」, 「立政」, 「周官」, 「君陳」, 「顧命」, 「康王之誥」, 「畢命」, 「君牙」, 「冏命」, 「呂刑」, 「文侯之命」, 「費誓」, 「秦誓」의 17편 등 모두 49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목차 가운데 권1 부분은 결락되고 권2, 권3 부분만 남아 있다.
본서는 홍석주가 주자학의 성과를 충실히 계승하는 입장에서, 채침의 『尙書集傳』의 내용 가운데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미흡한 부분은 보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홍석주의 동생 洪顯周1827년 본서를 정약용에게 전해주었고, 홍석주정약용의 『梅氏書評』을 읽고 난 뒤 두 사람 사이에 활발한 학문 토론이 벌어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조선말기·대한제국 시기의 문신 관료 金鶴鎭이 소장하고 있던 寫本 3책을 朝鮮光文會에서 활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서예가 惺堂 金敦熙가 편제면에 쓴 서명을 통해 그의 필체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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