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갤러리/풍산홍씨선조님 저서

마방통휘(麻方統彙)-19世祖 홍석주

홍만식(뜸부기) 2018. 9. 1. 20:11
조선 후기 노론 계열 학자인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1774년∼1842년)가 1802년에  간행한 마진(痲疹)에 관한 의서(醫書). 한독의학박물관 소장. 4권 4책. 목판본.
본관은 풍산. 초명은 호기. 자는 성백, 호는 연천. 별호 백악산초(白鶴山樵)  

조부는 영의정 홍낙성()이며, 부는 우부승지 홍인모()이고, 약관에 모시()·경례()·자사()·육예백가()의 글을 모두 읽어 일가를 이루었고, 한번 읽은 글은 평생 기억할 정도로 총명해 동료들이 감탄하였다. 

1795년 전강에서 수석을 하여 직부전시의 특전을 받았고, 그해 문과에 급제하여 직장·검열 등을 역임하고 1802년 정언이 되었다.

이듬해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후 성천부사·이조참의·병조참판·충청도관찰사·전라도관찰사·양관대제학·이조판서를 역임했다.

1834년에는 좌의정으로 세손의 사부가 되어 헌종과 인연을 맺었고, 안동김씨 세력의 주변적 신료로서 세도정국에 참여했고 순조가 사후 풍양조씨와 세력을 다투어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일익을 담당했다.

1836년 남응중의 모반에 연루되어 김로(金路)의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가 1839년 복직하여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학통상으로 노론 계열인 김창협(金昌協)·김원행(金元行)을 이었으며,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고염무(顧炎武)의 학문에 영향을 받았고, 실학·무실을 주안으로 하는 박학을 강조했으나, 고증학에서 의리를 뒤로 미루는 것은 폐단이라고 비판하면서 주자학의 원칙을 지켜야 함을 주장했다.

주자학설의 인식방법에서도 현상을 통해 본질을 추구한다는 역추·추리의 방법을 취했다.

특히 〈상서 尙書〉 연구에 힘을 기울여 성선설과 인물성이론에 근거를 두고 군주와 소인이 선험적으로 구분된다는 인간론을 강조했고, 이런 논리 위에서 봉건사회의 위기상황도 기존의

세력권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부분적인 제도의 변통 및 능력 본위의 신료 선발로 해결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 신권중심정치론으로 나타났다.

홍석주는 정약용(丁若鏞)의 『마과회통(麻科會通)』의 권수에 채록된 초론편에서 중국 마진서들의 서론과 그 일부를 빼고 특히 아속편(我俗篇)과 오견편(吾見篇)을 개편하였다.
그밖에 제일원증편(第一原證篇)·제이인증편(第二因證篇)·제삼변사편(第三辨似篇)·제사자이편(第四資異篇)·제칠합제편(第七合劑篇) 등을 재편성하여 원병편(原病篇)·잡증편(雜證篇)·변류편
(弁類篇)·방통편(房通篇)·탕액편(湯液篇)으로 그 명칭을 일부 변경시켰는데, 다른 각 편(篇)의 내용은 정약용의 원서와 일치되고 있다.
홍석주가 『마과회통』의 편저자 정약용의 이름을 노출시키지 않은 것은, 당시 정약용이 서학의 사옥으로 강진에 귀양가 있었던 때문으로 사료되나, 책명과 권차를 바꾸어 교정, 개간한 것은
홍씨일파의 세력이 컸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