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갤러리/풍산홍씨선조님 저서

신재집(新齋集)-17世祖홍낙명

홍만식(뜸부기) 2018. 9. 1. 09:39

조선 후기의 문신 홍낙명(命, 1722년∼1784년)의 시문집. 본관은 풍산(). 자는 자순(), 호는 신재(). 불분권 7책. 필사본. 연세대학교 도서관.

홍중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석보()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 홍상한()이며, 어머니는 어유봉()의 딸이고, 외조부 어유봉으로부터 수학하였다.

1741년(영조 17) 사마시에 합격하고, 1754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757년 정언·사서를 역임하고, 1762년 강동현령, 이듬해 부응교·필선·응교·교리를 거처. 1764년 부제학, 이듬해 참판·참의, 1766년에 대사성이 되었다.

1768년 승지, 이듬해 이조참의, 1773년에 대사헌을 지내고, 정조 즉위년에 강화유수를 거쳐 홍문관부제학이 되고, 1778년(정조 2)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병조판서를 지냈다.

정조 초 세도가인 홍국영()이 친척이라 하여 높은 벼슬에 매번 천거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정계에서 물러났다가 1780년홍국영이 실각하자 다시 등용되어 한성부판윤·의정부우참찬이 되었고, 그 뒤에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경사()에 밝고 특히 『소학』을 애독하였으며, 만년에 이황()과 중국의 한유()를 사숙하여 경서와 문장에 침음하였다.

서문·발문이 모두 없고 편집 경위와 필사 연도는 알 수 없다.

제1책은 부() 4편, 시 66수, 소차() 3편, 제2책은 서() 53편, 제3책은 서() 13편, 기() 21편, 제4책은 잡저 40편, 제5책은 잡저로 논 16편, 제발() 14편, 제6책은 묘지명 8편, 신도비 2편, 비명 5편, 묘갈 6편, 묘표 1편, 시장() 3편, 행장 3편, 제7책은 제문 43편, 애사 2편, 잡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 가운데 「반귀거래사()」는 도잠()이 지은 「귀거래사」의 뜻에 반대하는 내용의 작품으로, 전원으로 돌아감에는 마땅한 돌아감과 마땅치 않은 돌아감이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귀거래사」를 읽어보니 마땅한 돌아감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도잠이 팽택령()을 할 당시는 진()나라가 쇠미한 때로서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 있었는데,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물러나 술과 꽃만을 탐내는 것이 옳은가 하고 반문하였다.

시는 「추야영회()」·「우음()」·「즉경()」·「춘일영회()」 등에서 살필 수 있는 목가적 서정의 세계를 형상화한 것이 뛰어나다.

「즉경」은 연못에는 붉은 연꽃이 피어 있고 삽살개 짖는 소리가 먼 데서 들려오는 곳, 작자는 그곳에 정자를 짓고 집도 마련하였는데, 마치 그림 속의 것과 같다고 읊었다.

소는 사직소가 대부분이고, 서()는 본가에 올린 것을 비롯하여 대부분이 친척들에게 보낸 것이며, 이 가운데 외사촌 김종후()와 주고받은 것은 성리학에 대한 논의이다.

「답이엽()」에는 문장의 편법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는데, 자법()·구법()·장법()·편법()의 4법에 대해 논하였다.

「답배생()」은 배경리()와 예설에 관하여 논한 것이다.

「답종인낙훈()」은 『중용』의 색은장() 등에 대해 문목을 통해 상세히 논한 것이다.

논은 이윤()·부열() 등 중국 고래의 인물들의 공과를 논한 글이다.

제4책의 잡저 가운데에는 책문()이 15편이나 되는데, 문기()·이기()·세()·하늘의 기뻐함과 노함 등의 물음에 답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 내용이다.

제6책에는 묘지명·묘표 등 당시 각계각층의 다양한 인물들의 전기적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제7책의 잡지에는 『서경』·『논어』·『중용』에 관한 작자의 학문적 견해를 피력한 내용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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