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노론 계열 학자인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1774년∼1842년)가 신라·고구려·백제·발해의 역사를 간략하게 엮어 일반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든 책.
19세기에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2권 1책의 완질 필사본(인찰공책지). 연세대학교, 일본 오사카 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 소장.
본관은 풍산. 초명은 호기. 자는 성백, 호는 연천. 별호 백악산초(白鶴山樵)
조부는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이며, 부는 우부승지 홍인모(洪仁謨)이고, 약관에 모시(毛詩)·경례(經禮)·자사(子史)·육예백가(六藝百家)의 글을 모두 읽어 일가를
이루었고, 한번 읽은 글은 평생 기억할 정도로 총명해 동료들이 감탄하였다.
1795년 전강에서 수석을 하여 직부전시의 특전을 받았고, 그해 문과에 급제하여 직장·검열 등을 역임하고 1802년 정언이 되었다.
이듬해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후 성천부사·이조참의·병조참판·충청도관찰사·전라도관찰사·양관대제학·이조판서를 역임했다.
1834년에는 좌의정으로 세손의 사부가 되어 헌종과 인연을 맺었고, 안동김씨 세력의 주변적 신료로서 세도정국에 참여했고 순조가 사후 풍양조씨와 세력을
다투어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일익을 담당했다.
1836년 남응중의 모반에 연루되어 김로(金路)의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가 1839년 복직하여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학통상으로 노론 계열인 김창협(金昌協)·김원행(金元行)을 이었으며,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고염무(顧炎武)의 학문에 영향을 받았고, 실학·무실을 주안으로 하는
박학을 강조했으나, 고증학에서 의리를 뒤로 미루는 것은 폐단이라고 비판하면서 주자학의 원칙을 지켜야 함을 주장했다.
주자학설의 인식방법에서도 현상을 통해 본질을 추구한다는 역추·추리의 방법을 취했다.
<상서 尙書〉 연구에 힘을 기울여 성선설과 인물성이론에 근거를 두고 군주와 소인이 선험적으로 구분된다는 인간론을 강조했고, 이런 논리 위에서 봉건사회의
위기상황도 기존의 세력권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부분적인 제도의 변통 및 능력 본위의 신료 선발로 해결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 신권중심정치론으로 나타났다.
서문이나 발문, 목차도 없이 상하 2권의 본문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사세가 권제상(卷第上)'으로 시작되는 상권은 '신라'라는 제목으로 80면에 걸쳐 신라 건국부터 경순왕대까지의 사실을 기록하였다.
'동사세가 권제하(卷第下)'에서는 고구려, 백제, 발해 순으로 각 나라의 건국부터 멸망 때까지의 역사를 간추려서 기록하였다.
왕별로 구분하지도 않고 각 면당 10행 20자씩 일률적으로 기재하는 방식을 취했다.
한국의 고대사를 '세가'로 설정하고, 또 발해사도 신라나 고구려·백제처럼 '세가'로 다루고 있다.
신라·고구려·백제 부분은 『삼국사기』의 본기 기사를 주 자료로 했으나, 『동국통감』과 중국 정사의 조선전 기사로 보충을 했으며, 지명이 나올 때는
『동국여지승람』을 근거로 현재의 지명을 비정하여 쌍행으로 주기(註記)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이 없는 발해에 대해서는 『구당서』 발해말갈전과 『신당서』 발해전의 내용을 취사선택해서 기술하고, 『송사』와 『고려사』를 가지고
보충하였다.
신라, 고구려, 백제, 발해 세가의 분량이 각각 80면, 55면, 37면, 15면으로 분량의 차이가 현저하다.
이는 신라 중심적이라기보다는 『삼국사기』와 같이 저본이 되는 기록의 분량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기존의 사서에 나오는 내용을 토대로 각 나라별로 역사의 전개과정을 기술하였기 때문에 내용에서 특기할 만한 점을 찾기는 어렵다. 한의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BC.57)에 시작된 신라에 대해서는 주변의 소국들을 정벌하여 영역을 확장해가는 과정을 중시해서 『삼국사기』에 수록되어 있지 않는 내용을 『삼국유사』
와 『동국통감』의 기사를 채록하기도 했고, 『삼국사기』에 연월이 기재되지 않은 기사에 대해서는 연월을 구체적으로 기입한 기사도 상당수가 있다.
고구려의 건국과정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한 후 건국시기에 대해서는 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BC.37)이라 하였다.
백제의 건국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의 본문 및 이설인 할주를 섞어서 간략하게 엮고 온조왕 8년까지는 불과 몇 행으로 요약한 후 백제의 건국 연대를
전한의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BC.18)으로 기술하였다.
발해 왕실인 대씨의 출자에 대해서는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을 모두 수록하고 있다.
발해의 시조는 『구당서』 발해말갈전의 기사에 의거하여 대조영(大祚榮)으로 단정했으면서도 건국의 터전을 닦았던 지역에 대해서는 『신당서』 발해전의
기사에 근거하여 '읍루지동모산 (挹婁之東牟山)'이라고 하였으며, 발해국의 원명인 진국(震國)의 건국자에 대해 대조영의 아버지인 걸걸중상(乞乞仲象)으로
기술하고 있는 『신당서』 발해전의 기사를 병기하고 있다.
각 세가 말미에는 '찬(贊)'이라는 형식으로 한 나라의 풍속이나 흥망의 원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기도 했다.
신라세가 말미의 '찬'에서는 김부식이 신라기 12권을 만들었으나 내용이 소략하여 1000여 년간의 역사에서 훌륭한 임금과 어진 신하의 덕업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신라는 처음 세워졌을 때부터 군주는 근검하여 백성들을 사랑하고, 신하들은 곧고 어질어 목숨을 바쳤으며, 백성들은 모두 솔직하고 곧아 꾸미거나 거짓됨이 없었다고 보았다.
고구려세가 말미의 '찬'에서는 세상에서 동명왕이 기린을 타고 하늘에 올랐다거나 평양성에 동명왕의 유적이 많다고 한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라 하였다.
동명왕은 압록수 서북에서 흥기하였고, 6세손 동천왕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평양에 거주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구려가 조그만 나라로서 천하의 강국이 된 데는 어질고 지혜로운 신하의 도움이 컸는데, 오직 을지문덕의 공만을 이야기하고, 이것도 중국사서가 아니면 보이지 않으며, 안시성주의 이름도 전하지 않을 정도로 전해지는 기록이 소략함을 한탄하였다.
백제에 대한 '찬'에서는 중국의 사서에 나오는 고구려와 백제의 일은 우리나라 기록과 다른 바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백제가 신라와 계속 싸움을 벌이다가 망하기에 이르렀다고 하나, 의자왕이 향락에 빠지지 않고 간쟁하는 신하를 죽이지 않으며, 안으로는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밖으로는 중국을 삼가 섬겼다면 신라가 멸망시킬 수 없었다는 것, 즉 백제는 스스로 망했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발해세가 말미의 '찬'에서는 발해가 40만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대국으로 200여 년이나 존속했으며 법제와 문물이 뛰어난 나라였고, 그 강역이 고조선 및
고구려의 강역을 대부분 차지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 발해의 일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어서 상세히 기록했다고 밝히고 있다.
서문이나 발문은 없지만, 이상의 '찬'에 나오는 내용을 종합해보면 홍석주가 본서를 찬술하게 된 경위를 대략 파악할 수 있다.
중국인에 의해 서술된 고구려와 백제에 관한 기록이 사실과 다르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겠다는 의도가 있었다.
홍석주는 연행을 통해 중국의 동북지역에 있었던 고조선의 강역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발해의 영역이 고조선 및 고구려의 영역과 상당히
일치하는데도 이 사실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문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조선의 역사에 대해 정리해보고자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