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갤러리 829

흙수저 금수저 그리고 옻수저

나는 필시 흙수저를 타고 났을거라 생각하면 틀림이 없다. 내 몸에는 아예 금붙이가 없다. 그 흔한 금니도 없으니 말이다. 코로나가 극성인 시기에 서울에 올라왔다. 마침 점심때가 되어 간단한 요기를 위하여 식당에 들어 갔다. 잘난 서울 금수저들에게 뭔가를 보여 주고 싶었다. 9번 옻칠된 수저셑트를 내놓고 식사를 하였다. 식당에 비치 되어 있는 수저를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점을 생각해본다. 칫솔을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나. 어떤 심각한 병환을 앓고 있는 사람의 입속을 들락거렸을 식당의 수저를 공동으로 사용하는게 옳으냐? 숨 쉬는 공기도 못믿어 마스크를 착용하는 이시점에서 보건복지부는 무슨생각으로 업무에 임하고 봉급을 타먹을까? 이번에 재난지원금을 3조원이나 국민들에..

풍산홍씨 家 유물전

은제삼작노리개,조선시대 매죽문 장식의 방아다리, 중앙에 복자(福字)를 새긴 원형 투호(投壷)와 가운데 수자(壽字)를 새긴 육모형 투호로 구성되어 있다. 섬세한 은세공(銀細工) 솜씨가 돋보이는 중삼작(中三作) 노리개이다. 노리개의 매화문 중앙에 계관석(鷄冠石)을 물려 화려함을 더하고 있으며 위쪽에는 칠보 나비형 띠돈, 아래쪽에는 남 · 홍 · 황3색의 쌍봉술로 장식하였다. 영·정조시대의 풍산홍씨家 유물을 숙명여대에 기증한 것이다. 11월 30일에 국보로 지정되는 우리문중의 기사계첩(보물 639호)을 박물관에 기탁하고 싶다. 보물은 여러사람이 함께 볼 수 있어야 진정한 보물이 될 수가 있는법이다.

기사계첩 국보된다.

홍만조초상화 풍산홍씨 정익공파종회의 유물인 기사계첩이 1978년 12월 7일 보물 639호로 지정된 후 42년 만 에 국보로 승격된다. 숙종 하사로부터 300년간 보관을 잘해준 종가의 공로가 크다. 기사계첩은 현재 박물관과 개인 소장 등 총 5건이 전하는데 이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은 지난해 국보 325호로 지정됐다. 우리 문중의 기사계첩은 보관상태가 매우 좋다는 점 뿐 아니라 "晩退堂藏", "傳家寶藏" 이라는 글씨가 기록되었고, 화첩을 내함(內函)에 넣고 호갑(護匣, 가죽함)을 두른 후 외궤(外櫃)에 넣었는데 이 삼중의 보호장치가 그대로 전해진 점이주목 받았다고 한다. 풍산홍씨 정익공파종회 회장인 나도 실물을 본 적이 없다. 종중의 재산목록에 수록 되었지만 종가에 보관되어 있어서 분쟁이 있었지만 원형대..

호적단자-한국 천주교 최초수덕자 홍유한

예산군 두촌면 호동리 8통3호 거주시 유학 홍유한 호적단자(모당공문중 지계공파 홍기홍 소장) 홍유한(洪儒漢)선생은 한국 천주교 최초 수덕자이다. 본관은 풍산(豐山). 1765년(을유)에 작성된 「두촌면(豆村面) 호동리(狐洞里) 호적단자(戶籍單子)」에는 홍유한의 집이 두촌면 호동리 8통 3호에 있었고 당시 홍유한의 나이는 40세 였다. 1757년 서울에서 여사울로 내려온 이후 8년째 되던 해였다. 동거인 명부에 나오는 아들 팔희(八喜, 洪羲寅(초휘 洪樂質)의 아명)가 12세였다. 이 호적단자 안에 동거인으로 등재된 당년 15세의 아우 문인(文寅)이 복자 홍낙민(루카)이다. 1758년경 홍양한이 여사울로 이주하여 살다가 홍양한이 세상을 뜨고, 홍낙민, 홍낙교 형제는 한마을에 살던 재당숙 홍유한의 훈도를 받고..

여사울성지

종친으로 부터 사람을 찾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여사울성지 근처에 산다고 한다.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여사울을 찾아 나섰다. 예쁜 성당이 보인다. 일요일임에도 코로나로 인하여 예배를 드리지 않는 모양이다. 찾고있는 종친이름을 대자 성당에서 회장을 맏고 있다고 하면서 가까이 오지 말라며 경계가 심하다. 기왕 왔으니 성지를 둘러본다. 처음본것은 신종리 공소이다. 초딩시절 크리스마스때 교회를 가보고 성당은 처음 방문이다. 전등을 켜고 사진을 촬영하는 순간 홍낙민, 홍재영, 홍병주, 홍영주 홍필주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낙민은 첫째, 백영(栢榮) 둘째, 기영(杞榮) 세째, 재영(梓榮)을 두었다. 기영(杞榮) 아들 병주(秉周)베드로 1798生 1840 세남터에서 순교, 차손 영주(永周)1801生 1841년 새남..

날씨 거미에게 묻다.

기상청의 9일 오후 3시예보에 따르면 중부지방은 밤새많은 비를 내린다고 한다. 서쪽 하늘에 비구름이 잔뜩 머무는데, 우리집 높은 창가에 거미 한 마리가 일용할 양식을 얻고자 부지런히 집을 짓고 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실천하는것인가? 아니면 본능적으로 비가 많이 내리지 않을것을 인지하는 능력이 있는지 궁금하다. 기상청의 예보와 거미의 판단력을 지켜보자.

맹꽁이 소리를 듣다.

친구에게 사기 피해를 당하여 생활이 곤궁해지자 혼자서 노는 습관이 생겼다. 산속에서 조용히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육추 하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나를 되돌아본다. 사악한 인간에게 염증을 느껴 가급적 동창회 참석을 회피하였다. 미투사건으로 저명한 인사가 생을 마감했단다. 자살이라는 둥 타살이라는둥 두 가지로 갈리어 싸움질이다. 신이 내린 자연의소리 맹꽁이 합창으로 오염된 두귀를 씻고 왔다.

둥구나무

, 초딩시절 시오리길을 걸어서 학교에 가다 늘 마주치는 창터 둥구나무가 있다. 왕버들나무 이다. 나이도 꽤나 들었고 덩치도 만만치 않다. 고모님이 오시는 날이면 창터 둥구나무에서 만나 자전거로 모시고 왔다. 손님이 가실때도 둥구나무까지 배웅을 했다. 창터 사람들이 논매기 끝내고 휴식을 취하는곳도 저 둥구나무 아래에서 쉬었을게다. 창터에서 태어난 아이를 두팔을 벌려 반겨 주었고, 생을 마감하는이를 하늘로 안내해 주었을거다. 둥구나무는 만인의 어머니이며, 모든이 에게 마음의 고향이다. 창터의 역사와 비밀을 간직한채 오늘도 밀려오는 도시화의 물결 소리를 듣고있다.

평촌리 약사여래입상

평촌리 약사여래입상, 보물536호 충남 아산시 송악면 평촌리 산 1-1. 오로지 자동차 전용도로 지하통로를 통하여 찾아가야 한다. . 약사여래(藥師如來)는 이름 대로 중생의 질병을 고쳐주는 의료에 관련된 부처란다. 약사발을 두손에 들고있는 약사여래는 고려시대에 조성된것으로 조사되었으며 전체 키가 552cm에 이른다. 석불(石佛)에도 의미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륵불(彌勒佛)은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뒤 미래에 사바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부처를 가르킨다. 같은 돌이라도 용도에 따라 대우가 달라진다. 계단돌로 쓰이게 되면 무수한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신세가 되고, 불상으로 거듭나면 중생들로부터 각별한 숭앙심을 받게되기 마련이다. 나는 인생에서 어느 위치에 와있는가? 계단돌이 아닌 석불(石佛)..

아산(牙山)의 돌(石)

풍산홍씨가 아산에 뿌리내리고 살게된 것은 14세조(휘 중징)께서 1730년(영조6) 에 선친인 만퇴당(휘 만조) 묘소를 이장하면서 시작되었다. 나는 자칭 아산의 터줏대감이라고 자부 하였다. 그러면 나는 아산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비가 오는 날 아산(牙山)의 돌(石) 둘러보았다. ‘하늘은 녹(祿)이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내지 않는다.’고 한다. 바위 하나에도 이름과 전설이 깃 들여져 있었다. 이름 없는 풀이 없는데 하물며 이름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이름’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부모는 자식이 살아갈 삶에 대한 기대와 염원을 담는다. 내 이름의 훌륭한 의미답게 살고 있는지 되돌아 볼 시간을 가져보자. ‘호랑이는 ..